“하느님은 제 삶의 무지개"
두툼하게 말려진 김밥 위에 칼날이 닿는 순간 눈빛을 반짝인다. ‘꼬랑지’를 냉큼 집어 입에 넣는다. 어린 시절 소풍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 꼬랑지를 차지하려고 벼르던 기억들이 있다. 웬일인지 허물어질듯 어설픈 김밥 꼬랑지는 그리도 맛있었다.
요즘 가장 흔한 먹을거리 중 하나를 꼽으라면 김밥이 빠지 않는다. 길거리마다 특히 버스정거장 인근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음식점이 바로 김밥집이다.
분주한 출근길 아침식사, 오늘은 또 뭘 먹을까 고민되는 점심식사, 출출한 오후 간식, 김밥 한줄은 어디에나 어울린다. 아이들도 어르신들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식사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에 서민들의 주름이 더욱 늘어가는 때. ‘천원 김밥’ ‘삼각 김밥’ 등이 고유명사로 자리잡으면서 김밥은 서민들의 뱃속과 마음까지 부담없이 채워주는 음식으로 가장 먼저 꼽힌다.
이번 호 ‘취재현장속으로’에서는 김밥집의 하루를 함께 했다. 통통하게 잘 말린 김밥은 한입에 쏙 들어가는 깔끔한 먹거리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는 밥과 예닐곱가지 재료를 준비하는 일은 그 어떤 음식보다 손이 많이 간다.
오전 9시 무지개가 뜬다
김 한 장을 착 깔고, 한김 식힌 밥을 푸짐히 편다. 달걀지단에 햄, 시금치, 우엉 등등 형형색색의 재료가 ‘무지개’빛으로 얹힌다. 쓱싹 한줄이 말아진다. 손놀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그럼 이걸로 밥먹고 사는데 느리면 쓰나요. 혼자 운영하다 보니 그냥 익숙해진 것을….”
김찬겸(아녜스, 53, 인천 도화동본당)씨는 인천 박문여고 인근에서 즉석 김밥집 ‘무지개 분식’을 운영한다. 대개 오전 9시면 분식집 문을 활짝 연다. 동네 분식집 여는 시간 치고는 이르다. 20㎡ 남짓 자그마한 가게에는 테이블 네 개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의 하루는 대형 밥솥에 밥 앉히는 일로 시작된다. 혼자서 재료준비에서부터 음식 조리와 상차림, 설거지까지 하려면 김씨는 온종일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온 김밥 손님들을 치르고 나면 점심 손님을 위한 각종 음식재료를 준비한다. 대중없이 찾아드는 손님들을 위한 여분의 김밥까지 말아둔 후에야 잠시 숨을 돌렸다. 오늘은 단체 주문도 없어 한가한 편이다.
무지개를 닮은 마음
서울서 오느라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했겠다며 기자 앞에 참기름 듬뿍 바른 김밥을 썰어낸다. 별로 일한 것도 없이 먹으려니 멋쩍었지만 역시 김밥은 맛있다. 우적우적 신나게 먹어가며 대화를 시작했다.
김씨와 마주하고 앉으니 며칠 전 남편 퇴원을 돕느라 쌓인 피로에 입주변이 온통 부르튼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김밥장사에 나선 지 8년을 훌쩍 넘어섰다. 남의 가게일을 돌봐주다 무지개분식을 연 때는 6년 전이다. 친정식구들의 도움으로 분식집을 열면서부터 부족하나마 전세금 이자라도 낼 수 있게 됐다.
김씨는 수 십 년간 가장 아닌 가장 역할을 하며 밥벌이에 나서왔다. 남편은 결혼 직후부터 병치레 연속이었다. 늘상 폭력까지 행사했고, 몇 년 전부터는 정신분열증세까지 겹쳐 그의 고단함이 더하다. 배급쌀까지 받아먹어야할 만큼 빈곤했던 살림, 병자가 있다는 이유로 월세집에서도 쫓겨나는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는 어린아이들과 남편을 지켜왔다.
흐느낄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하는 삶에서 빛이 된 것은 하느님이었다. 시댁 식구들의 권유로 처음 성당을 찾았다.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낮엔 돈을 벌어야했기에 ‘그래 좀 조용한 밤에 하느님을 만나면 되지’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15년이 넘었지만 철야기도와 새벽미사 전례봉사는 꾸준히 해오고 있다. 주변사람들은 계속 이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힘들지요. 온종일 원망섞인 넋두리가 쏟아질 때도 많지요. 그렇지만 하느님을 믿는다고 틈만 나면 미사가방 챙겨들고 성당을 오가면서, 힘들다고 결국 이혼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다시 한번 더 사랑해보자고 다짐해봅니다.”
대화 내내 눈물이 제멋대로 솟는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눈물도 원망도 사그라든건 아니었다. 그저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힘을 얻을 뿐이다.
지갑 속 아들들의 사진을 보자 김씨 얼굴은 금새 함박꽃이 된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생각할수록 ‘마음 짠한’ 아이들이란다.
“그래도 이 김밥 장사하며 두 아들 모두 대학 뒷바라지를 했어요. 욕심낼 것 있나요.”
현재 큰 아들은 대기업에 취업했고, 둘째아들은 군복무 중이다. 모범생이었던 큰 아들 덕분에 김씨는 생전 처음 ‘보너스’를 접했다. 남편은 월급도 제대로 갖다준 적이 없었다.
김씨는 그동안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끊임없이 부어야 하는 병원비에 생활비는 그에게 숨쉴 틈을 주지 않았다. 평생 이자 갚는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지 오래다. 게다가 요즘엔 월급을 병원비에 보태는 큰아들한테 가장 미안하다.
김씨의 소원은 대형할인마트 쇼핑다. 재래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사야하는 생활로 한번도 대형할인마트를 가본 적이 없다.
우리들의 ‘무지개 카페’죠
대화가 너무 길었나. 김씨가 얼른 일어나 아끼던 에어콘을 튼다. 점심손님들을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김밥 외에도 각종 찌개와 분식류 메뉴를 갖추고 있다. 식사 준비를 넉넉히 해뒀는데 손님이 들지 않았다. 차츰 불안해지려는 찰나 갑자기 손님들이 밀려든다. 김씨는 몇 개의 가스불을 동시에 붙여 날랜 솜씨로 조리를 시작한다. 끊임없이 열기를 토하는 가스불 앞에서 땀은 비오듯 흐른다. 두명이 서면 꽉 차는 좁은 부엌에서 김씨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움직이느라 조바심이다.
한물결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냉면 한그릇을 말아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다시 들이닥친 손님들에 김씨는 냉면가락이 퉁퉁불어도 모른 척이다. 알량한 설거지 몇 번에 허리가 시큰댄다. 어느새 이웃 신자들이 와서 물도 나르고 행주질도 하고 주문도 받는다. 아주 익숙한 태도다. 김씨가 바쁠 때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돕는단다.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며 시시각각 발길을 잇는 이웃들. 오늘 무지개 분식에서는 손님 수보다 더 많은 이웃 신자들을 만난 것 같다.
“아, 여기는 무지개 카페에요.” 정거장이죠, 쉼터죠, 사랑방이죠…. 오가는 신자들마다 기자에게 친절히 한마디씩 설명해준다.
‘무지개 분식’은 다리를 쉬어가며 커피 한잔 즐기는 이들로 늘 붐빈다.
아침 설거지할 때 발견한 생뚱맞은 티스푼의 용도가 짐작된다. 제각각 아이스크림이며 수박이며 사다놓는다. 지난달엔 한 신자가 커피값이 많이 들겠다며 커피 한봉지도 사왔단다. 아닌게 아니라 매일 들어가는 커피값도 만만찮아 보인다.
구석 탁자 위에는 구역반장이 맡긴 모임용 복음나누기 교재도 쌓여 있다. 이웃들이 맡긴 택배상자가 쌓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오후 늦은 시간, 바닥청소까지 한바탕 끝내고 여유를 되찾자 김씨는 성경필사노트를 펼친다. 기름때가 묻을까봐 파일에 한 장씩 넣어두고 쓴다.
이 잠시의 짬은 김씨가 온전히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다.
기자는 함께 숨을 돌리며, 딴짓을 했다. 머릿속으로 암만 계산기를 돌려도 수지타산이 안맞는 듯 하다. 김씨는 모든 재료를 집에서 먹는 것보다 좋은 것으로 구입한다. 쌀이며 고춧가루며 국내산 최상품으로 쓰고, 참기름도 직접 짜다 쓴다. 적자에 허덕이다 못해 지난 3월 김밥값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렸더니 손님수도 뚝 떨어졌다. 김밥을 작게 싸고 다시 1000원으로 내리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먹거리는 먹거리다워야 한다는 김씨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오늘은 저녁장사를 일찍 마무리하고 가게문을 닫는단다. 철야기도를 하는 날이다. 수요일엔 오전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잠시 문을 잠근다.
“2~3000원 더 벌어 뭐하나요. 하느님 한번 뵙고 싶은 마음이 더 큰걸요….”
그리곤 누드김밥, 참치김밥 등등을 잽싸게 말아 포장한다. 수녀님들께 드릴 것이다. 이웃 신자 말이 김씨는 맛있는 김밥을 나누는게 ‘취미’란다. 참치를 너무 많이 넣어 터질 것 같다고 나무라는 기자말은 들은 척도 않는다. 테이블 네 개의 작은 ‘무지개 분식’ 사장님의 마음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화수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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