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몇 분이 옹기종기 모여 뭔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계신다. 인사 차, “뭐하셔요?” 여쭈니 방긋 웃으시며, “옥수수 다듬잖아요” 하신다. 손이 성하지 않은데도 껍질을 벗기고 다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내가 머무는 이곳 ‘다미안의 집’(한센인 생활시설)에는 서른 여 명의 어르신들이 살고 계신다. 이른 아침 일어나서 기도와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여력이 있으신 분들은 농사일을 즐겨하시는데, 거둔 곡식을 다듬거나 주방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면 참 정겹고 고맙다.
간혹 별 것 아닌 일로 수녀님들께 투정을 부리기도 하시고, 옆방 어르신과 소리소리 고함을 지르며 다투실 땐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그런 것 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실까, 이해하게 된다.사실 이분들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고,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많이 섭섭하셨으리라 본다. 그 첫 번째 섭섭함은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시선이었으리라.
한 어르신이 오래전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한번은 시장에 있는 과일가게에 들러 두리번두리번 과일을 보며 고르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눈총을 주며, “빨리 나가라”, “당신들한테는 팔지 않겠다”고 하니, 화가 치밀어 눈에 보이는 과일은 전부 둘러엎으셨단다. 나도 맞장구치며 “잘하셨어요!”했다.
한 어르신은 정착마을에 살며 겪어야 했던 아픔 중 자녀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어르신의 딸이 어느 정도 성장한 학창시절,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할 때, 마을 앞 정거장이 아니라 한 정거장을 더 걸어가서 타더라는 것이다. 그 마을에 산다는 사실을 들추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결혼 정년기가 되면, 혼삿길이 막히지 않을까 염려하여 자식에게 “부모님 안 계신다고 말해라” 당부했다는데,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이분들과 관련된 아픈 사연들은 말로 다 풀어낼 수 없을 듯하다. 자신 앞에 주어진 현실들을 그냥 그렇게 속으로 삭이며 이겨내 오셨으니 간혹 누군가에게 섭섭한 대접을 받는다 싶으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든 어르신들이 이곳 생활에서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자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짤막하고 뭉텅해진 손가락, 남들 앞에 내밀기 부끄러울 수 있는 그 손으로 고추를 따고, 감자를 캐고, 냉이를 다듬고…, 그렇게 손을 펴고 사신다. 한 번은 식탁에 올라온 냉잇국을 먹다가 건더기를 좀 남겼더니, 밥해주는 식관 자매님이, “다 드셔요. 이 냉이 어르신들이 캐서 주신 거예요” 하시기에, 후루룩 다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 마음도 펴지는 것인가?
어르신들이 매일 아침 미사 시작 전 ‘사제들의 기도’를 바치며 나를 기억해주시고 여러 모로 극진히 대해주시는데, 나는 이분들에게 무엇으로 더 보탬이 되어 드릴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간혹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업을 하고 계시면 나는 왠지 습관처럼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너도 손을 펴라!”
이형철 신부 (안동교구 사회복지회 사무국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