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 신부님들의 서품 상본과 성구들 그리고 그들의 각오를 읽으며 문득 2년 전 나의 서품 성구와 상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 46)
‘실 인형이 춤을 춥니다. 그 아름다운 춤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인형은 알고 있습니다. 그 박수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형은 단지 온전히 줄에 의지하여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 뒤에서 움직인 주인이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막 세상 구원을 위한 공연이 다시 시작되려나 봅니다. 아버지의 손에 저의 작은 영을 맡기고 성령에 이끌려 한바탕 춤을 추어 보렵니다.’
지금 그 춤을 추고 있습니다. 쉽게 넘어지기도 하고 어설픈 춤에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박수 소리에 도취되어 나의 의지로 더 잘해 보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더 어색하게 연출되는 우스꽝스런 춤을 발견합니다. 그 때 마다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2고린 12, 10)는 말씀을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잡습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방황하는 모세를 하느님께서는 떨기나무 아래로 부르시어 벅찬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나약한 자신을 드러낼 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팔로 모세를 감싸주시어 그를 도구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습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주님께 맡길 때 당신의 오른팔로 이루어주시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춤!
안셀름 그륀 신부님께서 저술한 ‘사람을 살려라’라는 책에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곤궁함을 체험하는 영성과 침묵이 필요하며, 침묵 중에 우리 고통의 공허함과 무능함을 하느님께 바치면 그분은 그것을 당신의 현존으로 메우신다.”
한 영혼의 지독한 고통과 외로움 앞에서 어떠한 위로의 말문도 막혀버리는 버거운 순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공허함과 무능함을 맞이하는 상황! 그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의지적인 노력에 앞서 침묵하며 자신의 한계를 봉헌합니다.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선생님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기듯 말입니다. 손의 힘을 빼면 뺄수록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자연스러운 글씨가 써집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 20)는 말씀에 의지하며 맡길 때 복음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며 어느새 그 사람의 눈가에는 희망의 눈물이 반짝이는 모습 안에서 당신의 현존으로 채워주심을 강하게 느끼곤 합니다.
저는 가끔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나무를 바라보며 침묵을 배웁니다. 그 침묵이 만들어낸 편안한 쉼터! 아무 말 없이 늘 그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 여름날 따가운 햇살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 햇살을 통해 침묵 속에 푸르름을 만들어갑니다. 푸르름의 그늘은 쉼터가 되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맞아들입니다. 뜨거운 시련을 이겨내면 이겨 낼수록 더욱더 넓어지는 푸르름!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은 역경을 이겨내면 이겨낼수록 더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때로는 미사 강론을 통해 천 마디 말을 전했을 때 보다 침묵 가운데 형제의 손을 잡아 주었을 때 하느님과의 사랑의 교감을 온몸으로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왜 많은 말을 하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성급한 마음의 결과입니다. 생각하고 있는 의욕을 실천하기보다 미리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서, 그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버릴 때 말의 필요성이 줄어들 것입니다. 나무처럼 침묵을 통해 온 몸으로 가슴으로 사랑을 말하는 법을 배워봅니다. 말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사람의 쉼터를 만들어주는 나무, 그와 같은 나무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후배 사제 여러분! 우리 함께 어깨를 맞대고 이제 신명 나는 영적인 춤을 추어 봅시다. 미약한 우리를 통해 주님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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