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성장하며 삶의 지침 직접 선택
인간은 다양한 배경·신체적 조건 갖춰
소속된 세계서 독립 의지로 질서 부여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잘 살게 될까. 신앙인이라면 흔히들 하느님께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면 하느님께 대한 지순한 향함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를 안다는 것은 바로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잘 살아간다는 말인가.
내가 이 세상 안에서 처한 위치를 분명히 알고 내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면 ‘잘 산다는 것’은 더 쉬워진다. 내가 나를 알아야 그 목적에 맞게 더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세상안에서 나는 또 누구인가.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그냥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동물처럼 한 인생 왔다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가 처한 ‘특별한 현실’을 잘 인식해야 한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하느님)는 나를 창조했다. 이 나를 이루는 토대가 바로 세가지 생명 형태라고 했다. 그 하나는 신체(형성과학에서는 생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형성과학에서는 역할). 또 다른 하나는 영(형성과학에서는 초월)이다.
문제는 이 세계에는 나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다 보면 서로 다른 네 가지 차원이 역동적으로 복잡하게 연결된다. 이 연결 관계가 어떻냐에 따라서 나의 삶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그 네 가지는 바로 ▲사회역사적 차원 ▲생체적 차원 ▲역할적 차원 ▲초월적 차원이다.
우선 사회역사적인 차원은 우리의 삶에 형성과정이 발생하는 현재의 기초적인 배경 내지는 상황이다. 쉽게 말하면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다. 한국인으로, 특정 종교 문화에서 태어나는 것이 그렇고,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그렇다. 인간은 이렇게 태어나는 배경이 다르다. 부잣집에서 태어날 수 도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는 이렇게 기초적인 배경이 있는데 그 배경이 사회역사인 것이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또 다른 배경들을 만나게 된다. 농촌에서 자라던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대학생이 되면서 도시로 이사를 갈 수 있다. 사회에 속해 어울려 살아가면서 다양한 또 다른 배경을 가진 환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과 연결 관계를 맺는 두 번째 차원은 ‘생체적 차원’이다. 우리는 황인종이다. 더 나아가 알레르기 체질이 있을 수 있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체질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일종의 독립적인 정신과 의지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 ‘역할적 차원’이다. 인간은 주어진 주변 환경에 그대로 매몰되지 않는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생명 내지 삶과 세계에 대해서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삶의 형태를 부여해 줄 지시 내지 지침들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정신적인 토대는 갖고 있지만, 정신적인 능력은 발휘하지 못한다. 씨앗은 있지만 아직 싹은 틔우지 못했다. 하지만 1~2살이 되면서 점차 스스로의 독립적 정신과 의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부모가 하지 말라고 말려도, 잠깐만 한눈을 팔면 입에 장난감을 집어 넣는다. 자기 고집과 생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자라게 되면 독립적 의지는 더욱 강해진다. 쇼핑몰에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간 상황을 상상해 보자. 유치원 나이일 때만 해도 부모를 졸졸 잘 따라 다니던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자신이 사고 싶은 곳으로 자기 발로 걸어서 간다. 이렇게 되면 부모와 아이 간에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그 긴장관계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판단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독립적 의지는 나름대로 질서를 잡기 시작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계속 발전하다 보면 드디어 인간은 자신의 재능을 깨닫기 시작한다. 피아노를 칠 수도 있고, 영어 공부에 능력을 보일 수도 있다.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을 한다.
인간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초월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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