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성당 주임신부님으로부터 교중미사를 부탁받았다. 교구 사회복지회 홍보도 할 겸 기꺼운 마음으로 나섰다. 예전에 사제서품을 받고 그곳에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땐 공소 공동체였고, 지금은 본당공동체로 성장해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다 새로 단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20여 평 되는 푸근한 공간인데 거기서 밥도 해먹고 교육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회합도 하는 듯 했다. 주방 쪽을 바라보니 예쁜 색종이에 식당 이름을 적어 놓았다. ‘풀향기 식당’. “풀향기? 풀에도 향기가 있었나?” 혼자 대뇌었다. ‘풀냄새’ 하면 금방 기억에서 떠오르겠는데, ‘풀향기’라 하니 언젠가 맡아본 것 같기도 하고…, 어렴풋했다.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본당에 다섯 구역이 있는데 교중미사 후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당번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부패식인데 그 날은 비벼 먹을 수 있도록 온갖 나물을 차려놓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식당 이름 참 특이하네요. 맨날 풀만 먹는다고 풀향기인가요?”라고 물어보았다. 앞에 앉은 회장님이 웃으시며, “가끔 고기도 나와요” 하신다. 인접해 있는 청송본당 교우 중 시를 잘 쓰는 분이 이름지어주셨다 한다. 내 질문은 계속 되었다. “풀향기가 어떤 향기죠?” 저쪽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이른 새벽, 들에 나가면 맡을 수 있어요” 하신다. 농사를 오랫동안 지으신 분 같았다. “어쨌든 참 좋은 이름이네요. 요란스러운 향기가 아니라 풋풋하고 촌스러운 향기를 내고 살아라, 이 말이죠?” 나름대로 해석했는데 둘러앉은 분들이 ‘맞다’고 동의했다. “음식 준비하는 비용은 본당에서 부담하나요?” 여쭈니, “한 그릇에 천원입니다” 하시며, 마분지로 만든 금고를 보여주셨다. 나도 밥값은 내야 될 듯 하여 지갑을 열고 폼을 잡으니, “신부님한테는 못 받습니다” 라며 기어코 말리시는 바람에 천원 벌었다. 천원만 번 것이 아니라 ‘풀향기 식당’이라는 이름과 거기 모인 사람들 덕분에 많이 웃었다.
교중미사 후 급히 집에 돌아가는 것이 썩 좋지 않아 최근 몇몇 본당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이런 분위기인가 싶었다. 도시의 큰 본당이라고 못할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시골 본당에서 쉽게 맘먹고 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풀향기는 곧 시골본당에서 풍길 수 있는 본당공동체의 냄새를 말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음식을 나누면서 정을 나누고, 본당 돌아가는 사정도 알고, 좋은 일 해보자는 계획도 꾸민다면 소박한 나눔 자리가 되지 않을까? 매번 음식 준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풀향기 식당이 오래오래 지속되고 나눔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빌며 돌아왔다. 청송의 교우 박유스티노가 지은 ‘풀향기’라는 시를 허락 없이 옮겨 적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 아름다운 생명 / 풀잎이여 /
바람결에 풀꽃 피워 /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 더불어 함께하는 / 보시기에 좋은 세상 /
그 이름 / 풀향기이어라
이형철 신부 (안동교구 사회복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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