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뜻을 없이하시고
당신 뜻으로 채우소서
파란 하늘 아래 여지없이 태양이 작열한다.
새까만 머리 탓인지 금세 뜨거워졌지만 따끔따끔한 이 느낌이 좋다. 고단한 순례의 길을 가는 한 수사를 누군가 쓰다듬어주는 느낌이랄까.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서 땡볕을 피하다가 ‘나의 사부,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쉬어갔겠지’하는 생각을 했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7대 교회의 순례도 어느덧 끝이 보인다. 오늘 도착한 곳은 우상(偶像)을 섬기다 못해 다른 나라에서 우상을 수입해서까지 섬겨왔다는 ‘페르가몬’. 묵시록의 저자에게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꾸짖음을 당할만하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 발라암은 발락을 부추겨,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불륜을 저지르게 한 자다.”(묵시 2, 14)
우상을 섬겨 야단을 맞은 교회. ‘우상을 섬기다니’라며 혀를 끌끌 차다 불현듯 우리도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점, 미신행위 등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우상’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상이란 집착과 욕심,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매일 줄줄 외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아닌, 내 뜻으로 이뤄져야만 했다.
나의 필요나 집착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느님, 어떤 것보다 내가 우선시 돼야 한다는 잘못된 자기 집착은 잘못된 신앙의 탓이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하느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혹의 탈을 쓴 우상이 덤벼들었을 때, 우리는 번번이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손을 얹고 내가 섬기는 우상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술’을, ‘돈’을, ‘도박’을, ‘담배’를, 혹은 ‘오락’을 섬기지는 않는가. 내가 힘들 때 찾게 되는 무언가는 ‘하느님’이 아니라 ‘술’이 아닌지, 동료와의 ‘험담’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조용히, 조용히,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우상들에게 잠식돼가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우리의 삶은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좀 달라야 한다.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그래서 어리석은 우상놀음에 빠지지 않고 그분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부이며 모범이 되시는 사도 성 바오로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 수 있다. 수많은 역경과 유혹 속에서도 그분이 성인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한 분에 대한 오롯한 ‘사랑’이었고 하느님 한 분에 고정된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동주 도마 수사, 나 자신부터 바오로 사도와 닮은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팍팍한 세상,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의 노력은 우리들이 없어짐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이 땅에 나비의 작은 움직임처럼 남아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필리 1, 21)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를 묵상하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 페르가몬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중 하나. 페르가몬은 터키 서부의 중요한 고대 도시로 스미르나 북쪽 109km 지점에 있으며 유다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이 많이 살았다.
요한 묵시록 2장 13절에 보면 페르가몬에 ‘사탄의 권좌’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고지대에 세워진 아우구스투스 신전 또는 제우스 신의 제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페르가몬 도심에는 사도 요한 성당이 있다. 본디 2세기에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섬기려고 붉은 벽돌로 지은 신전이었는데, 비잔틴 시대에 내벽을 쌓아 성당으로 개조했다. 에페소와 필라델피아에도 사도 요한 성당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비잔틴 시대에 사도 요한이 거둔 성과가 매우 높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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