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죄, 저것도 죄-언젠가 비행기 옆자리 남미 여성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부모와 조부모 모두 열심한 신자들이지만 자신은 어릴 적 기억밖에 없단다. 세례 받고 가정과 신앙교육 모두 천주교 일색이었던 어린 시절이 별로 기쁘지 않단다.
‘해야 한다, 하지마라! 이것도 죄, 저것도 죄!’라는 것에 지쳐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단다. ‘사랑하라’보다 ‘죄짓지 마라’는 부정적 교훈이, 기쁨과 행복보다 근엄함과 엄격함이 마치 신앙의 본질인 듯 가르친 사람들의 영향을 떨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 말을 들으며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린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보다는 죄와 규칙들의 엄격함을 배운 것처럼 느껴졌다.
형식과 제도가 신앙인가?-성탄과 부활 판공, 교적 정리, 교무금, 미사 참례, 영성체 때의 손 모양, 9일 기도 순서, 기도문 외우기 등 전례와 신앙생활의 형식이 복음의 본질 보다 더 강조될 때마다 사람들은 기쁘지 않고 경직되는 것 같다. 신자들 중 형식과 제도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공부와 복음 나누기보다 신부들과의 친교가 더 큰 일이고 자랑거리다. “제가 하는 일이 복음이나 교회의 사회 가르침에 합당한가요?”라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9일 기도 하루 빼먹었는데 어쩌지요?”라는 질문을 받기 일쑤다. 제도와 전례의 근엄함과 비장함, 엄격하게 느껴지는 규칙들-사실 엄격한 규칙보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더 엄격했다-은 내 어릴 적 우울한 분위기와 맞아 청소년기와 신학교 시절, 그리고 신부가 되어서도 언제나 나는 진지하다 못해 과도하게 심각했다. 사랑이신 하느님,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은 머릿속 신학이었을 뿐 마음속엔 자책과 죄책, 자기연민과 우울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이 서질 못했다.
그러다 예수마음 배움터 주관 피정을 통해 드디어 하느님을 인격적인 분, 대화할 수 있는 분으로 받아들였고 이전의 경직된 생각에서 조금씩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신학 안에 있던 하느님, 윤리와 죄의식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던 하느님,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신념 안에서만 있던 하느님이 그제야 인격적인 분으로 다가왔다.
기도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배웠고 윤리교과서처럼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 다 저의 잘못입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애로 제 원수들을 멸하시고 제 영혼을 괴롭히는 자들을 모두 없애소서”(시편 143)라고 분노와 미움마저도 기도할 수 있는 솔직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윤리 강령이 신앙인 줄 알았고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이라는 신념과 이상을 더 사랑했던 내게 시편기도는 설명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였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할 결정적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치워주십시오”라는 기도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는 기도도 그랬다. 아빠 아버지를 신뢰하며 종알대는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는 걱정 고민 미움 분노까지 모든 마음의 감정을 숨김없이 말씀드리고 감정을 보듬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힘겹고 아픈 일들이 잇달아 겹칠 때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다. 손해를 끼친 사람이 미워 죽겠고 용서한다고 기도하는데 용서도 안 되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운데 원망 섞인 기도는 못하고 이래저래 혼자 속 끓이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사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원망할 수 있고 떼를 쓰고 푸념하다 결국 승복하고 마는 것인데 그 과정은 다 생략되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용서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내 안의 억압된 감정은 오히려 일그러져 다른 출구를 찾는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하십시오”라고 하면 “에이, 어떻게 그래요. 죄잖아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주 충~분히 원망하고 나서야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탕자의 비유 둘째아들처럼 얼마나 바보 같고 죄 많은 사람이었는지 생각하며 가슴 치는 것보다, 끝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어둑한 한편에서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첫째 아들처럼 엄격함에 스스로를 묶어 놓는 것보다 기쁘게 받아주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주인공은 두 아들을 모두 품어 안는 아버지다. 신부 생활이 오래될수록 더 엄격한 사람보다는 너그럽고 인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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