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안에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천국와 지옥…' 있다
터키 아이들이 몰려왔다.
작은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대로, 큰 아이들은 큰 아이들대로 짧은 영어를 통해 말을 걸어온다. 사진기를 들이대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기도 하고, 사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성 바오로회 수사인 나를, 한국에서 온 영화배우쯤 되는 줄 아나보다. 선글라스를 쓰고 웃음을 지었더니 날더러 ‘재키찬(성룡)’이란다.
순례하는 한국인들이 그들은 마냥 신기하다. 무너진 교회터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작은 꼬마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요한묵시록 여섯 번째 교회 티아티라는 다른 교회터보다 영 볼품이 없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교회 건물의 조각들, 볼품없는 기둥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름 모를 잡초만이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며 교회 돌바닥 사이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한다.
주머니 속 작은 성경을 꺼내 펼쳤다.
“너는 이제벨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다.”(묵시 2, 20)
티아티라의 거짓 예언녀 이제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방해하는 한 요인일 것이다. 아주 달콤하고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중의 유혹이다. 현세의 짜릿하고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 즉 우리가 종종 말하는 마음속의 ‘악마’다.
세상이 주는 화려함과 즐거움의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내 마음 깊은 곳, 그 곳 어딘가에도 거짓 예언녀 이제벨이 있음을 인정한다.
수도원 형제들과 정을 나누고 살아온 지도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희로애락 속에 친형제보다 살가워진, 진심으로 사랑하는 형제들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수도원 형제들과 환하게 마음이 열린 상태로 지내다가도, 또 다른 날에는 그 형제가 보기도 싫고 말을 걸기조차 싫을 때가 있다. ‘내 마음 속 분열’은 수도원에 사는 이 수사에게도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물며 속세에 살고 있는 교우들을 어떠할까.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도 모두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거짓 예언녀 이제벨’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잘하거나 잘못을 하거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돌아보시며 사랑으로서 기다려 주신다.
하느님은 자비이시다. 우리가 거짓 예언녀 이제벨의 말에서 벗어나기를, 깨닫기를, 회개하기를,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
정말 새로 태어나기를 원하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엄중한 결단을 요구하신다. 무너져 내린 티아티라 교회터지만 돌바닥과 돌기둥 사이사이, 무명초가 끈질기게 피어나고 있는 그 이유를 오늘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 20)
-내 마음 속 분열을 돌아보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 티아티라
자색 옷감의 도시
페르가몬에서 동남쪽으로 85km 떨어진 평원 한가운데 현대도시 아키사르, 즉 티아티라가 있다. 리디아인들이 기원전 680년경 티아티라와 사르디스 일대에 왕국을 건설, 위세를 떨쳤으나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 고레스 2세 대왕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티아티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 비단은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대단한 고가품이어서 부자들이 입을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가 제2차 전도여행 중(50~52년경) 필리피에서 전도할 때 가장 먼저 입교한 이가 바로 티아티라 출신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라는 여인이었다.(사도 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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