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속에서 새로남
그리스!
혹자는 그리스를 ‘자유의 나라’라고 했다. 나는 지금 새로운 대륙, 새 환경과 새 문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있다. 기대와 함께 두려움도 엄습한다. 속일 수 없는 감정이다.
사도 바오로도 나와 같은 감정이었지 않았을까.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응답하고도 인간적 두려움은 때때로 그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리스는 터키와 국경을 나란히 두고도 분명히 다른 느낌의 나라로 다가왔다. 이슬람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터키와 달리, 그리스는 ‘자유’ 그 자체였다. 하루를 두 번 살기 위해 낮잠을 꼭 잔다는 ‘시에스타’의 나라다. 무비자로 국경을 넘나드셨을 바오로 사도와는 달리 나는 입국심사와 함께 여권에 도장을 받았다. 감회가 새롭다. 국경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린 것 같다. 까발라 항구에 도착했다. 성경 상 네아폴리스에 해당하는 곳. 바오로 사도는 트로아스를 떠나 이곳을 거쳐 필리피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까발라 항구에 노을이 깊었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항구 근처에 노천카페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는 이들. 터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나 또한 몸을 실으며 항구에 오도카니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아시아와 유럽. 사부는 어떻게 복음전파에 성공했을까. 이토록 다른 문화,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말이다. 바오로 사도는 사회, 문화, 종교에 빠르게 적응하신 분이다. 토착민들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대화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브라질에서 선교할 당시, 사부와 같이 행동하지 못 했다.
2003년 부활절이었던가. 브라질 수녀님이 손을 잡고 춤을 추자는 말에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었다. 그곳에서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춤을 배워야 한다. 기쁜 음악과 함께 추는 사교춤은 브라질에서 필수적 요소다.
또 한 가지 우스운 이야기다. 종신서원을 하기 전 유기서원자, 그러니까 공동체에서도 한참 어린 동료 수사님들과 지낼 때다.(브라질 수도회들은 14~15세부터 입회가 가능) 나이가 한참 어린 브라질 수사가 플라스틱 콜라병으로 머리를 자꾸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것이다. 일전에도 얼떨결에 얻어맞아 기분이 나빴다. 계속해서 머리를 얻어맞는 순간, 나는 폭발했다.
나도 모르게 형제를 밀쳐냈는데 그 수사가 넘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원장 수사님이 방에서 튀어나오실 정도였다. 사실 브라질은 아이들이 주교님 머리를 쓰다듬고, 나이 어린 형제들이 노인의 머리나 어깨를 치는 행위가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나는 졸지에 어린 후배의 애정이 담긴 행동에 무식하게 대응하는 선교사가 돼버렸다. 까발라 항구를 보며 나는 스스로 다짐한다. 수도자가 되기 이전,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인간이 되리라.
까발라 항구의 깊어가는 자유를 만끽하며 나는 한 가지를 더 배웠다. 선교사란 파견된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들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살아가는 존재란 것을 말이다. 바오로 로드를 가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그리스 순례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나는 아직 내게 다가올 많은 일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파견된 곳의 문화 속으로 녹아들기로 다짐하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 그리스, 그리고 까발라 항구의 기념벽화
사도의 행적을 모자이크로
그리스는 1822년 터키로부터 독립을 선언, 1829년 아드리아노플 화약과 이듬해 런던회의에서 독립이 보장됐다. 수도는 아테네이며 그리스정교가 98%를 차지한다. 동안과 북동안은 에게해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800km에 이르러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접하고 동쪽은 터키와 접한다.
바오로는 환시를 보고 유럽선교의 꿈을 안은 채 트로아스 항구로 달려가 마케도니아(그리스)로 가는 배에 올랐다. 트로아스에서 가장 가까운 마케도니아 지방의 항구는 바닷길로 185km 떨어진 네아폴리스(까발라)다. 이곳에는 바오로를 기념하기 위한 성당과 벽화가 세워져있는데 사도가 도착하기까지의 역사적 장면을 모자이크로 담아놓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