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 37)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다. 오늘따라 기분이 착 가라 앉는 것이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어제 연주회를 끝내고 난 후유증인가? 한가하게 쉬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스위스와 독일 유학시절이 스쳐간다.
높은 산과 호수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스위스와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여유로운 소떼가 노니는 독일, 그리고 그곳은 무엇보다 대음악가와 대문호들이 숨 쉬던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살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답답한 맘을 잠시라도 위로해 준다. 그곳에 살면서 뮌휀 대교구의 신문을 읽어가던 중 이런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난다. “Gott ja, aber Kirche nein.”(하느님 예. 그러나 교회 아니오) 내용인즉 하느님은 믿고 따르지만 교회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유럽인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계제도 안의 지도급 인사들이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예’와 ‘아니요’ 외에 다른 말을 더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마태오 복음 5장 37절의 말씀은 달리 말해서 ‘아는 것은 안다’ 또는 ‘옳은 것은 예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또는 ‘옳지 않은 것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현실을 본 때 교회의 안팎에서 이 말씀을 못 알아듣고 있다. 나의 전문 분야가 교회음악이기에 한국 가톨릭교회 음악의 현 상황을 예로 들고 싶다.
성사 중의 성사인 성체성사(미사성제)에서 우리는 많은 성가를 부른다. 성가를 부르는 이유는 첫째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찬송 하기 위함이요, 둘째는 성가를 부르며 듣는 이들이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느끼며 그 분 안에서 천상의 기쁨을 맛보는 은총을 얻게 하는데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음악은 교회음악 전문가에 의해 다루어져야 한다. 또 교구 단위나 관구 단위로 교회음악 전문가를 교육하는 전문 기관이 필요하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제6장 성음악 115조) 그리고 전문기관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양성된 교회음악 전문 교사들을 교구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채용해야 하지만 한국 가톨릭교회는 성가대 담당자들에게 희생적 봉사만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의 발전은 아주 묘연하다. 그 누가 수년 동안 시간과 교육비를 들여가며 연구하고 연마한 결과를 봉사로만 일관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 현 한국 가톨릭교회 교회음악분야의 실정은 참으로 딱하다. 교회음악 전문가도 아닌 취미음악가(?) 또는 비 교회음악 전문가가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고 성가대원들 중에는 70% 이상이 악보를 볼 줄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성체성사 안에서의 성가들은 뒤죽박죽이다. 성가를 들으면 하느님을 체험하기는커녕 분심을 일으키고 불쾌감마저 든다. 여기서 잘 어울리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마태 15, 14b) 이에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실망스러운 일이다.
언젠가 서울 어느 병원에서 3대의 미사를 드려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첫째 주일미사 성가는 근처 성당의 성가대에서 맡아서 하는데 영성체 후 성가를 부르는데 유행가를 가사 그대로 부른다. 미사 후에 성가대 단장에게 물으니 대답이 기절할 일이다. “미사 때 유행가 부르면 안 되나요?” 둘째 주일 미사는 국악미사라고 한다. 들어보니 참 울화가 치민다. 자비송은 아리랑 가락에, 대영광송은 신고산 타령에, 할렐루야는 옹헤야 가락에, 그리고 봉헌성가는 울산아가씨 가락에 가사를 붙였다. 둘째주일마다 그렇게 한다는데 그 병원 성당 담당 신부와 수녀는 로마 가톨릭신부, 수녀인지 의심스럽다.
중고등부와 청년들이 부르는 성가책이라는 것은 도대체 개신교 찬송가 모음집인지 팝송인지 유행가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노래에 미사를 드리고 나면 어느 누가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체험한다고 하겠는가? 이 심각한 사실을 한국의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전례헌장 6장을 곱씹으면서 주님을 경배하는 행위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겠다. “그들은 헛되이 예비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마르 7, 7) 하신 이 말씀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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