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세로 ‘형성적 에너지’ 주고 받아라
타인과 인애로운 ‘관계’ 갖는 것이 신앙인 자세
이웃 존중하며 인격적·영적 ‘상호 형성’ 이뤄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 모든 것이 주고받는(give and take) 관계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상호 형성적이다. 주고 받음으로써 나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독불장군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세상은 상호 형성적이게끔 창조됐다. 따라서 일방적인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은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독재정치는 일방적인 것이다.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 혼자서 모든 것을 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정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홀륭해 보이는 독재라도 결국에는 옳지 않은 결과를 낳는 것은 그것이 창조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이 가족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신앙인답지 않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비성숙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당에 열심히 나오고, 남 보는 곳에서 기도도 열심히 하는 장관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장관이 자신이 장관이라고 해서 차관 등 아랫사람을 마음 내키는 대로 부린다면 그는 진정한 신앙인이 아니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그는 신앙인이 아니다. 아랫사람과 인애로운 관계 속에서 화목하고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다.
이처럼 사람은 서로 주고 받는, 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한다. 이를 형성적 영성에서는 상호 형성이라고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면 ‘인터 포메이션’(inter-formation)이다. 인터(inter)가 무엇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되, 좋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나쁜 것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나쁜 것을 가지고 들어오시겠는가. 하느님은 늘 우리 안에 그 어떤 영적인 것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또 은총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영적인 것과 은총은 형성적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 자신 안에 미리 형성시켜 놓은 그 좋은 것들을 잘 형성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들에게 반(反)형성적인 것(형성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우리는 이웃 혹은 가족을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강제로 주입하려 한다. 내 생각이 옳다고 한다. 그리고 지시하고 강압한다. 그 지시와 강압이 들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고 억압한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악과 죄로 얼룩지는 것은 이처럼 서로를 형성시키지 않고 반(反)형성적인 것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높고 낮음을 따지고, 파워게임만 한다. 남이 내 말을 복종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나 혼자만 잘되려고 한다. 문제는 나 혼자만 잘 됐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도 모두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알력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고통이 생긴다. 개인적 관계이든 공동체적 관계든 국가적 관계든 모두 힘에 논리에 의해 이뤄지면 늘 강자 위주이고 약자는 종속된다. 이래서는 영적인 세상이 아니다. 영적인 세상은 약자와 강자가 함께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평등한 것이다. 평등한 가운데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을 주고 받아야 한다. 서로를 형성시켜 주어야 한다. 서로 간에 형성적 에너지를 주고 받아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낮추어야 한다. 아랫사람이 돼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남들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남 보다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부족하고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뭐가 두려워서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가. 뭐가 부족해 다른 사람 앞에, 다른 사람의 발등을 밟고 머리 위에 억지로 서려고 하는가. 담대해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발바닥 밑에 들어가면 어떤가. 뭐가 걱정이고 불안한가. 백그라운드에 우리를 종의 모습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 하느님이 계시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