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성인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지옥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수감자 때문에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10명의 수감자 중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콜베 성인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
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 1, 7)
진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많은 나를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내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을 뽑으라면 다음 말씀일듯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훗날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을 것을 뻔히 아셨던 하느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은 창조주인 하느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까닭은, 당신을 볼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이웃들을 보면서 당신을 ‘보라’하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성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 20)
내 곁에 있는 이웃은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죽음에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길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전 어느 가수가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랫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최종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내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바로 하느님 나라, 그 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이 하느님이고, 이웃이 예수님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가르침에서 엄히 지적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애덕송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사랑의 첫 발신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전파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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