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끝이 아닌 새로운 경계”
천국은 시·공간 개념 아닌 사랑과 친교 완성
지옥은 복된 이들과 친교 스스로 거부한 상태
연옥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거치는 정화
1987년 겨울, 원주교구 풍수원성당. 지금은 고인이 된 지학순 주교가 당시 백발성성한 모습으로 견진성사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교리 중에 궁금한 것 있으면 질문해요.” 까까머리 중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한다. “주교님,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나요? 존재한다면 어떤 곳인가요.”
지학순 주교가 엷은 미소를 띠고 질문에 대답한다. 유명한 ‘교향곡 천국론’이 여기서 나온다. “여러분. 교향곡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사람은 교향곡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안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교향곡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향곡을 듣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천국에서는 영원히 교향곡이 울려 퍼집니다. 땅에서 살면서 교향곡을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교향곡 진가를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놔도 그 곳이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지 주교는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하느님은 선(善)이시다. 악(惡)은 선과 공존할 수 없다. 천국 지옥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선한 삶을 살아야 참 선이신 하느님과 공존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선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지옥이다.”라며 자신의 천국 지옥관을 피력했다. 지 주교의 이러한 해석은 천국과 지옥, 연옥은 장소적 개념이 아닌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있다’는 상태적 개념이다.
고 지학순 주교의 말은 교회의 가르침을 지극히 단순화해 중학생 정도의 수준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그만큼 천국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의 언어를 통해 천국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비유로(루카 13, 20~21;마르 4, 30~32) 천국(하느님의 나라)을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국 교리는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중 맨 앞줄에 서 있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말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 15)는 것이었다.
천국은 시공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이자 무한한 사랑의 영역으로서 사랑과 친교가 완성된 상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됐고 한 사람이 사랑을 위해 작은 선택을 할 때 이미 거기서 천국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시작은 완성에 이르지 않았고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 도달할 때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 오늘날 천국에 대한 공통된 해석이다.
반대로 지옥은 하느님과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음으로써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자유로이 선택한 영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쇠를 녹이는 그런 불길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영원한 소외의 상태, 영원한 고통의 상태가 지속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천국과 지옥의 교리는 개신교도 가톨릭교회와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는 개신교에는 없는 연옥교리가 첨부된다. 연옥에 대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후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데에 장애되는 온갖 흠들을 제거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은총 안에서 죽었지만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 않기에, 정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구별된다. 연옥이라는 말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성경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또 교회 안에서 꾸준하게 이어져온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깊이 연결된다.
연옥의 영혼들은 지상의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 등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 이런 기도는 통공(通功) 신앙의 표현이다. 기도와 함께 죽은 이를 위한 지향으로 행해지는 희생이나 선행 등을 통해, ‘대사’의 의미가 가능해진다. 교회가 매년 기념하고 있는 ‘위령성월’ 역시 이러한 교리적 가르침과 전통에 바탕을 둔다.
1994년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선종한 ‘사랑의 혁명가’ 고 배문한 신부(수원교구)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자궁 속 태아에게 책상, 컴퓨터, 전화, 영어 등의 개념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한 뒤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수없이 천국에 대해 설명했지만, 인간은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그 개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세계는 죽음 뒤에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의 자궁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기를 맞는 가족은 행복의 환호를 지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세상에서는 모두 울음을 터뜨린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환호가 울려 퍼진다.”
사진설명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537~41년 , 프레스코, 13.7×12.2m,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 부분. 최후의 심판은 종말론에서 다루는 재림, 육신의 부활, 천국·연옥·지옥 등의 교리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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