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월적 형성은 타인의 형태 쇄신
내면 형성 잘못된 사람은 타인·사회에도 악영향
참 신앙인 통한 상호형성은 초월적 단계로 진화
인간들이 예수님을 체포, 포박했다. 그리고 법정에다 세워놓고 따진다.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말해 보라.”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이들이 참 진리이신 예수님께 따진다. 수준이 낮고,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렇게 대한다. 내면이 파괴되어 있고 내면이 병에 걸려있기에 예수님께 이렇게 한다. 내면이 초월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지 않기에 이렇게 한다.
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는가.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떠들면서 인간들을 훈계하는가. “이런 무식한 놈들”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한없이 깊은 자비의 눈, 영적인 눈으로 그저 가만히 바라보신다. 참으로 깊은 예수님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그 깊고 깊은 내면을 닮을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것이 주고받는(give and take) 관계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지 못한다. 정신적 차원의 삶, 영성적 차원의 삶도 그렇다. 서로 주고 받으며 영향을 주고, 그렇게 성장해간다. 매사에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트집 잡기를 일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을 만나는 이들은 누구나 얼굴이 일그러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인간은 상호 스스로를 형성해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해 놓은 그 무엇을 완성시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사람은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망친다. 반형성적이다. 형성을 망친다. 내가 스스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아름다운 형태를 더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망친다.
이를 바꿔 말하면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은, 모든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 사람은 내면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살아가다보면 중병에 걸린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몸이 아파야만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데 혼자서만 잘되려고 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상호 형성적으로 살도록 했는데 이 사람은 이러한 세상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사람의 영향을 전혀 받을 필요가 없다. 고민하거나 마음아파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쪽에 있는 것이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성껏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된다.
내면 형성이 잘못된 이들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만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도 망친다. 이 세상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면 형성이 잘못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높은 직책, 많은 돈, 세속적 능력을 가지고 으스대려 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면이 잘 형성된 이들이 지도자가 되고 리더가 되면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내면 형성이 중요하다.
이런 상호 형성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전 생애 내내 발생한다.
초등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청년 시절….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중 좋은 사람은 나의 삶에 큰 형성적 영향을 준다. 그 사람은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 있다.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주고 받는 상호형성의 관계는 이제 초월적 형성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나와 만난 사람이 인격적이나 정서적으로 좋은 이라면 나의 형태를 쇄신시키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나와 만난 그 사람이 참 신앙인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신 분이라면 그 사람은 나를 신비로 연결시킬 것이다. 그 사람에 의해 나는 초월적으로 나의 형태가 변화된다. 눈빛과 손짓과 모든 것이 예뻐진다. 내가 초월적으로 변하면 나 또한 다른 이웃에게 초월적 형성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새벽미사 매일 나오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그 모습에서 영적 힘을 느낄 수 있다. 참으로 신비롭다. 성체조배실에서 70세 80세 할머니들이 무릎 꿇고 앉아 성경 읽는 모습에선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화장 짙게 하고, 사치스런 이야기하고, 불평하는 모습에선 신비스러움을 발견할 수 없다. 옆에 있기 싫어진다. 불평하는 것은 나이 30대에서 끝내야 한다. 40대가 지나서도 불평하고 인상 찌푸리고 다니는 사람은 귀중한 삶을 허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 50이 되도, 60이 되도, 70이 되도 늘 그 수준이 그 수준이다. 이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마련하신 형성의 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보들보들해져야 한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초형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형성의 신적신비에로, 그 중심에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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