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이 남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똑같이 죽음을 준비한다 하더라도 삶을 포기하며 죽는 것과 완성하며 죽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11월. 떨어지는 낙엽을 하나 둘 밟으며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모현 호스피스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사, 스님, 수도자가 함께 살고,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함께 죽는 곳. 모두가 죽기에 ‘죽음’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우리는 외로우면서도 외롭지 않다.
# 해바라기
환자 한 사람이 실려 오며 모현 호스피스센터의 차분한 아침이 밝았다. 모현 호스피스센터의 손영순 수녀가 웃음을 띠며 기자를 맞이했다.
“삶을 완성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 호스피스죠. 죽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은 가장 중요해요.”
그는 죽는 이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도 달라진다고 했다. 죽음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회진을 시작했다. 해바라기, 쟈스민, 팬지, 은방울 등 꽃 이름으로 된 병실을 두드린다. ‘당신께 드리고 싶은 정성을 마음에 담았습니다’라는 명찰을 가슴에 단 의사와 간호사가 환자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넸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자들도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환자의 상황과 기분마저도 아는 의료진들은 엄마의 죽음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20대 아들을 위해 먼저 상담을 청했다.
“나는 돈은 많은데 사는 것은 거지같이 살았어.”
한 할머니는 인생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사의 청진기에 따라 숨을 내쉬며 할머니는 연신 봉숭아물 들인 손가락을 움직였다.
# 쟈스민
“한 소년가장이 있었어요. 스무살이었는데 맺힌 것이 많아서였는지 얼마나 봉사자들을 힘들게 했는지…. 그런데 마지막에 소원이 있다면서 봉사자에게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대요. 봉사자를 껴안고 ‘엄마! 엄마!’를 외치며 하늘로 갔어요.”
손수녀는 호스피스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하늘로 보냈다. ‘죽음은 죽어가는 자만의 것이 아니라 산 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은 그가 직접 겪은 체험이다.
병실로 다시 올라가 환자 황성희(안나·51)씨를 만났다.
2005년 담도암으로 시작해 10개월 후 대장암까지 얻게 된 그는 죽음 앞에서 ‘편안함’을 찾고자 모현 호스피스센터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첫째로 내 마음의 편안함을 위해 이곳을 찾았고, 둘째로는 내가 떠난 다음에 가족이 편할 수 있도록 여기 왔어요. 우리는 서로 이별의 준비를 여기서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는 이곳에서 ‘믿음’도 다시 찾았다. 오랜 냉담기간을 마치고 이제야 신앙의 끈을 잡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아들에게는 ‘외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열쇠는 믿음밖에 없더라’는 교훈도 매일 전해주고 있다고 했다.
황씨의 병실은 ‘쟈스민’방이다. 꽃말이 ‘행복, 사랑의 기쁨’이라고 적혀있었다.
# 팬지
손수녀는 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듯 죽음은 죽어가는 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현 호스피스에서는 사별가족 모임도 열고 있어요. 죽어가는 자와 산 자, 남아있는 자들이 화해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일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마당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는 환자를 위해 의료진들이 마당까지 달려가고,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환자와 가족의 상처까지 함께 어루만지는 곳. ‘죽음’만을 앞두고 있는 환자이기에 호스피스는 모든 것을 환자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활짝 웃으며 가족사진을 찍는 환자들을 보셨어요? 마지막 가는 그 길은 춥고 어두운 중환자실이 아닌, 가족과 함께 하는 길이어야죠.”
환자들과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못한 채 호스피스센터를 돌아서는 길. 길가에 꽃 한 송이가 예쁘게 피었다.
※문의 031-536-8998, 535-0066 모현 호스피스센터
■ 모현 호스피스 봉사자 박인미씨의 사연
하느님은 저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어느 날 문득 제게 작은 선물을 하나 주셨다. 우리 딸이 13살 되던 생일날, 나는 ‘자궁내막암’이라는 생일선물 치고는 꽤 가볍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병원에서의 검사와 수술. 두려움보다는 믿음을 강하게 주신 덕분인지 모든 결과도 ‘행운이고 다행이다, 그래서 행복하겠다’는 지인들의 위로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3년 전이었던가. 나는 모현 의료센터에서 말기암 환자들의 아로마 발 마사지 봉사를 시작했다. 임종을 기다리는 말기암 환자들의 이름 대신 나는 한쪽 다리밖에 없어 부끄러워하시던 발, 나무토막처럼 부어 무거워 보이던 발, 뼈만 앙상하게 남아 가랑잎 같던 발과 항암치료로 인해 뱀가죽처럼 갈라져 허연 비늘이 떨어질 것 같은 발을 기억한다.
늘 고생만 하던 그 발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따뜻하고 정성스럽게 향기를 바르고 만져주면 그날만큼은 모르핀을 맞지 않고 잠을 청한다는 말씀에 코끝이 찡해오는 감동도 여러 번 느꼈다. 환자들의 감사와 가족들의 격려는 그동안 내게도 커다란 공부였나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암환자를 위해 봉사하던 나를 암환자로 만드신 하느님. 병원에서 수술 전 병자성사를 받으며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그토록 당당했건만 죽음 앞에 갑자기 나타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나의 암을 통해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마음을 보았다. 얼마나 두렵고 아프고 그리울까. 항암치료를 다 받고 모든 적과의 싸움도 이제 할 수 없는 그분들 앞에서 나는 너무도 부끄럽다.
항생제 하나에도 너무 독해 구토까지 하면서 엄살을 떨고 힘들어 했던 내 모습. 하지만 나는 내 병을 통해 왜 이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요즘 나는 함께 봉사하는 우리 학생들과 회원들에게 전하곤 한다.
중환자실에서의 발마사지는 가급적 부드럽게, 좀 더 회복한 후에는 강하지만 정성스럽고 조용하게,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의 발마사지는 ‘임금님 발을 만지듯 환자자신이 존귀함을 느끼도록 마음을 다해 가족처럼’해야 한다고.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9월 수술을 마치고 내 몸에서 떠난 암이지만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자들의 마음과 고통을 작게나마 공유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위령성월을 맞이해 우리 봉사자들의 작고 여린 손들을 거쳐 간 수많은 발의 주인공들이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편안한 잠을 주무실 수 있기를, 하늘나라에서는 영혼의 고통 없이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사진설명
▲모현 호스피스센터의 손영순 수녀가 환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온기를 전해준다. 할머니는 밝은 웃음으로 인사한다.
▲죽음을 앞두고 '편안함'을 얻기 위해 모현 호스피스를 찾았다는 황성희씨(우측). 옆 병상의 조남제씨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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