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금교령 이후 250년간 혹독한 박해
하비에르, 입국 후 야마구찌에서 선교 시동
영주 오타노부, 교토에 교회 ‘난반지’설립
본지는 11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거행되는 ‘베드로 키베와 187위 순교자 시복식’을 앞두고 일본 가톨릭교회의 순교사를 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 교회의 시복식은 한국교회에도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시복 시성은 지역 교회의 경사일뿐 아니라 보편교회의 경사이며, 순교영성은 보편교회가 함께 기억하고 살아야 할 영적 토대이다. 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이며 일본 교회사 전문가인 카다오카 치즈코(片岡 千鶴子) 수녀의 글을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2008년 11월 24일 ‘베드로 키베와 187순교자’를 ‘복자’로 인정하는 공식 선언인 시복식이 일본 나가사키시(長崎市)에서 개최된다. 일본 순교자의 시복준비는 이미 고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81년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 시작되었다. 교황님은 일본 체재 중에 몇 차례나 일본 순교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순교의 언덕 니시자카(西坂)의 순교자들이 증거한 사랑을 현대인들의 마음에 새기도록 전 세계를 향하여 메시지를 발표하셨다.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유럽의 각국에 알려져 있다. 연구가들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를 모두 합치면 4~5만 명의 순교자가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순교자 중에 1862년에 성인반열에 오른 ‘26 성인 순교자’와 1987년에 시성된 ‘성 토마스와 15 순교자’, 1867년에 복자품에 오른 ‘205 순교 복자’를 모시고 있다.
이번에 전 교황님의 일본 순교자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1982년 일본 주교단은 정식으로 시복 조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 실현하게 되었다. 이 188위 시복식의 경사스러움을 앞두고 짧게나마 ‘일본 가톨릭 순교사’를 주제로 순교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키리시탄 순교역사의 특징
키리시탄은 포르투갈어 ‘christao’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키리시탄이란 ‘가톨릭의 가르침’ 또는 ‘가톨릭 신자’를 의미하는 일본의 역사적 용어이다.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 중에서 키리시탄사(史)로 구분하는 시기는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가톨릭을 전한 1549년부터 메이지(明治) 정부가 그리스도교 금지를 폐지한 1873년까지 320년간을 일컫는다. 그 중 1614년에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禁敎令)을 선포한 이후 259년간은 대단히 혹독한 박해시대가 이어진다.
일본 가톨릭 교회사의 박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오랜 기간 혹독한 박해의 연속이었다는 점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는 점 ▲긴 박해 기간 중 한명의 사제도 없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계승하였다는 점 ▲박해를 감수한 키리시탄은 무저항의 저항으로 인해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서 박해가 끝났다는 점 등이다.
일본의 길고도 혹독한 박해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거의 같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일본 교회와 로마교회는 꽤나 큰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로마제국의 박해도 길고 오래 계속되었으나 황제에 따라서 혹독하기도 했고 평온하기도 했으며, 광대한 로마제국의 지역을 따라 박해가 심한 곳에서 평온한 지역으로 피난 가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의 박해는 역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법령으로 엄격하게 다스려졌기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감시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황, 주교, 사제, 신자의 튼튼한 교계제도가 움직이는 조직체가 있었으나 일본 교회의 경우는 사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200년 이상 계속되는 가운데 온전히 신자들만의 신앙의 힘으로 신앙을 전승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대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박해를 종식시켰으나, 일본의 경우는 ‘신앙탄압’에 대한 국제적 여론과 비판을 받은 일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끝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324년간의 키리시탄 역사는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 입국에서부터 사제 추방령 선포까지
2) 사제 추방령 선포에서부터 1614년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까지
3)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에서부터 1639년 포르투갈의 무역선 도항 금지까지
4) 신자의 잠복에서부터 종교자유의 부활까지.
1. 하비에르 선교사 입국에서부터 1587년 사제 추방령 선포까지
1549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동료들은 카고시마에 상륙한다. 코레스 테 토-레스, 주앙 헤르난데스, 카고시마의 일본인 무사(武士) 안지로 등이다.
하비에르는 입국 후 교토(京都)로 가서 일왕(日王)을 만나 선교 허가를 받고 일본선교의 첫발걸음을 내딛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교토에 간 하비에르는 일왕의 정치적인 힘이 아니고 유력한 다이묘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일본선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계획을 바꾸어 교토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야마구찌에 들러 그곳의 다이묘(大名:영주(領主)) 오오우찌 요시나가를 만나 선교허가를 부탁했다. 유럽의 진귀한 선물을 지참하여 갔을 때 다이묘 오오우찌 요시나가는 매우 만족히 생각하고 선교 허락과 함께 거주지로 다이도우지(大道寺)라는 절을 선물로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일본 키리시탄 선교의 첫발은 시작되었고 야마구찌의 선교에서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세례를 받는다. 그는 가난하고 눈이 부자유한 맹인 비파연주가로 키리시탄 시대의 대단히 훌륭한 선교사로 활약한 이루만 로렌소이다.
1551년 포르투갈 무역선의 입항을 알게 된 하비에르는 붕고, 후나이로 거처를 옮긴다. 여기에서도 하비에르는 일본 교회의 중요 인물 중의 한명을 만나는데 그가 후에 키리시탄 다이묘 오토모소우린 프란치스코이다.
하비에르는 토레스 신부에게 일본 선교를 위탁하고 자신은 1551년 11월 일본을 떠난다.
약 2년간의 일본 선교에서 하비에르 성인이 방문한 곳은 카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찌, 교토, 붕고 등 5개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성인이 일본에 뿌린 선교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일본의 키리시탄은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후 가고 비렐라 신부가 입국했다. 1556년 무역 상인이며 외과 의사인 알메이다가 예수회에 입회하고 1563년 프로이스 신부가 입국한다. 1559년 비렐라 신부와 이루만 로렌소가 교토에 들어가 다음해에 쇼군(13대)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선교허가를 받아 하비에르 성인의 염원이었던 교토 선교에 착수하게 된다.
이 와중에 교토의 엔랴쿠지의 불승들 사이에 논쟁이 발생하였고 비렐라 일행을 교토에서 추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종교간 논쟁의 상대가 되었던 3명 다카야마 히다, 유키야 마시로, 히요하라 시게카다는 큰 감명을 받고 반대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교토지방의 교회는 크게 성장한다.
이렇게 하여 키리시탄의 역사는 크게 변하게 된다. 1573년 오타노부나가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로부터 추방시키고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오타노부나가는 선교사를 보호하고 교토에 ‘난반지(南蠻寺)’라 부르는 교회를 세우도록 허가를 하여 3층 건물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 난반지의 교회는 교토의 명소가 되었다.
한편, 큐슈(九州)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생긴다. 1562년 히라도에서 포르투갈 선장과 다수의 포르투갈 상인이 살해당하는 ‘미야노마에 소요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무역 항구를 찾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요코세우라를 포르투갈 무역항으로 개방하여 선교사들을 초대한다. 알메이다, 토레스 신부가 요코세우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오오무라지방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알메이다 신부는 아리마 요시사타의 초대로 아리마 영내의 시마바라, 구찌노쯔에 교회를 세운다. 토레스 신부와 친분관계를 갖게 된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사제들로부터 큰 감화를 받아 1563년 세례를 받으므로(바르톨로메오) 일본 최초의 신자 다이묘가 탄생한다.
그러나 영주의 세례에 반감을 가진 일부의 불교도가 반란을 일으켜 요코세우라 교회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포르투갈 무역선은 무역 항구를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1570년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영내에 좋은 항구를 발견하는데 포르투갈 무역항구로 나가사키를 개항한다. 그리고 길쭉하고(長) 튀어나온 곳(갑, 岬=奇)에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키리시탄의 도시 나가사키’의 시작이다. 1571년 나가사키는 200가구에 인구 1000명 정도였으나 포르투갈의 배가 입항하면 다른 외국인과 더불어 몇 배가 되기도 했다.<계속>
카다오카 치즈코 수녀〈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순심회 수녀원〉
사진설명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제 추방령’ 칙서. 히라도시 마츠우라 역사박물관 소장.
▲일본에 천주교를 처음 전파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초상. 코베시립 난반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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