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군에 오른 이에야스(德川家康) 박해 전조 금교령 선포
"선교금지 어겼다" 이유로 1597년 니시자카(西坂)에서 선교사·신자 26명 첫 순교
1579년 순찰사 발리냐노가 입국한다. 하비에르의 입국 이후 30년 동안 선교활동의 영역은 서쪽에서는 나가사키로부터 동쪽으로는 교토지방까지 넓혀졌고 키리시탄은 10만을 넘을 만큼 되었다. 발리냐노 신부는 일본의 상황을 시찰하고 몇 가지의 개혁을 단행한다.
선교활동을 조직화하고 일본의 문화를 존중하는 토착화를 선교방침으로 확립했다. 발리냐노 신부의 개혁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 사제양성을 지향하여 콜레지오(대신학교), 세미나리오(소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580년 아리마와 아즈치 두 곳에 세미나리오를, 후나이에 콜레지오를 설립하고 유럽의 사상과 문화를 도입하여 키리시탄 문화를 꽃피우는 기초가 되었다.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인 사제와 동료들은 박해 중에 신자를 도우며 순교까지 이른다.
1581년 발리냐노 신부는 교토와 아즈치에서 오타노부 나가의 환대를 받고 각지의 교회를 방문 시찰하고 나가사키에 돌아와 일본교회의 희망에 충만하여 키리시탄 다이묘 오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노부나가, 오토모 소린이 파견하는 소년사절단을 데리고 로마를 향하여 1582년 2월 나가사키를 출발했다.
그런데 발리냐노 신부가 출발한 지 4개월 후 오타노부 나가는 ‘혼노우지의 난’으로 갑자기 쓰러져 일본의 정치에 큰 변화가 닥쳐온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정권을 쥐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의 수하에는 많은 키리시탄 다이묘가 있었다. 선교활동도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을 즈음에 1587년 큐슈를 평정하고 하카다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교사 추방령을 선포하고 일본은 신의 나라(神國)이므로 키리시탄 선교를 금지함을 선언하고 선교사들은 20일 이내에 일본을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키리시탄 다이묘의 중심인물이었던 다카야마 우콘을 불러들여 신앙을 버리든가 다이묘의 신분을 버리든가 선택하게 했고 다카야마 우콘은 신앙을 선택함으로써 재산과 명예를 박탈당하게 된다. 게다가 나가사키를 몰수하여 직할령으로 만들고 각지에 세워졌던 교회를 모두 파괴시켰다. 일본 교회는 대단히 큰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현명한 대응책으로 박해가 크게 번지지는 않았으나 히데요시의 추방령은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에도 막부 시대를 이어가며 그리스도교 금교령의 근거가 되었다.
2. ‘사제 추방령’ 선포에서부터 1614년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금교령 선포까지
‘사제추방령’ 선포이후, 1590년 인도왕국의 사절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한 발리냐노 신부와 함께 천정소년사절단(天正少年使節團)이 귀국한다.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그들을 호의적인 태도로 접견하나 선교금지령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 접견에 반감을 갖는 이들로 인해 박해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미리 감지한 선교사들은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삼가고 각지로 분산하여 사목에 주력했으므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더욱 심화됐다.
키리시탄 다이묘 아리마하루노부의 보호아래 시마바라에서 수업을 계속했던 세미나리오(소신학교)는 소년사절단이 가지고 온 인쇄기로 교과서를 인쇄하는 등 새로운 유럽 문화를 접함으로써 활발한 교육활동이 행해졌다.
그러던 중 1597년 26성인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발단은 사제추방령이었다. 히데요시는 도사(土佐)에 표착한 산 페리페호가 법령을 어기고 선교사를 승선시켰다는 이유로 배의 적하물을 모두 몰수했다. 국내에서도 선교사들이 금지령을 어기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프란치스코회의 베드로 팝치스타 신부와 6명의 외국인 선교사, 신자 등 26명을 체포하여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에서 처형한 것이다. 26성인의 순교는 일본의 최고 권력자의 명령에 의하여 일어난 최초의 순교사건으로서 국내에서는 물론, 유럽에까지도 충격을 준 에도시대의 박해와 순교 역사의 전조(前兆)가 되는 사건이다.
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다. 바로 그때, 발리냐노 신부와 세루케이라 주교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주교좌를 나가사키에 두었던 관계로 나가사키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일본의 로마’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키리시탄의 도시 나가사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611년, 나가사키에는 11개의 교회가 건립되었고 주일과 대축일에는 어느 교회에서나 신자가 흘러넘쳤으며 그 중 몇 곳의 교회에서는 2~3회 나누어 주일미사를 해야 했고 그때마다 만석이 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은 일본 정치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얻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쥔 후 1603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열고 1605년에 쇼군직(장군)을 양도하여 정권을 도쿠가와 가문이 계승함을 선포했다. 그러나 오사카에 있는 히데요시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에게 기대하는 유력한 다이묘가 많았으므로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확립하기는 힘들었다.
이에야스는 1614년 오사카의 전투에서 히데요시가(家)가 완전히 멸망되기까지 자신의 편을 모으기 위해 만사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키리시탄 선교는 관동지방에서부터 관북지방까지 광범위하게 넓혀졌으며 신자 수는 37만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선교사들이 수차례 사제추방령을 거두어주기를 청원함에도 응하지 않고 히데요시가 발표한 사제추방령을 취소하지 않은 채 국내에서 키리시탄 금지는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키리시탄을 싫어하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영내에서 순교사건이 일어났다. 이번에 시복되는 188위 순교자중, 구마모토의 다케다 고효에 등은 1603년 열렬한 일연종(日連宗) 신자였던 영주 가토우 기요마사에 의해, 이끼쯔끼의 니시켄카는 1609년 히라도의 다이묘 마츠우라의 명에 의해 순교한다. 이윽고 박해의 검은 구름은 교회의 보호자이었던 키리시탄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의 영지에서부터 시작됐다.
1612년, 오카모도 다이하찌 사건을 계기로 아리마 하루노부는 카이에 유배되어 죽는다.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는 배교하여 박해자로 바뀌며 세미나리오는 아리마에서 쫓겨나 나가사키로 옮겨간다. 같은 시기에 이에야스는 슨뿌성에 자신의 가신단들 중에도 키리시탄이 있음을 알게 되자 대단히 분노하여 1612년 도쿠가와의 영지 안에서 키리시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1614년에는 전국의 다이묘 영지에까지 금지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린다.〈계속〉
카다오카 치즈코 수녀〈나가사키 순심대학 학장·순심회 수녀원〉
사진설명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1614년 전국에 선포한 금교령 팻말. 히데요시 가(家)에 이어 쇼군에 오른 이에야스는 1612년 자신의 영지(嶺地)에서 금교령을 내린데 이어 1614년 금교령을 전국에 확대했다.
▲목숨을 버려 참 생명을 살다
- 일본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형벌들. 사람을 마치 짐승을 잡듯 매달고 고문을 가하고(두번째 사진), 거꾸로 매달아 파놓은 구덩이에 머리를 쳐박아 죽이기도 했다(세번째 사진). 네번째 사진은 물고문 형벌. 이외에도 눈속에서 얼어죽게 하거나 화형, 열탕 고문 등 갖가지 형벌이 가해졌다.
▲키리시탄 다이묘(大名, 영주)의 중심 인물이었던 다카야마 우콘의 동상.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이후 다카야마 우콘은 다이묘 신분을 버리고 신앙을 택함으로써 모든 재산과 명예를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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