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일로 교우들을 소집하게 되면 보통 30여 명 정도 나오신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에는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지만, 여름이 되어 해가 길어질수록 농장에 가는 시간은 앞당겨진다. ‘유기농’이라는 단어 하나 잘못 선택(?)한 덕택에 우리 농장은 봄부터 수확 때까지 ‘풀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더위가 심해질수록 이른 새벽에 나가 서너 시간 부리나케 마치고 돌아와야 하는데, 언제나 일손 하나가 아쉽지만 억지로 나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나오시는 분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하루는 성당에 모여 출정(?) 준비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 오시기에 “다리도 편치 않으신데 왜 나오셨어요?”하니 그분 하시는 말씀, “이 중에서 다리 성한 이 있깐유?” 하신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도시 본당에서야 60대 정도 되면 본당에서 무슨 일이 있든 뒷전으로 물러 계셔도 사실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겠지만, 우리 본당은 60세 정도면 그야말로 ‘애들’이고 70세 정도 겨우(?)되시면 한참 일하실 큰 일꾼이다.
내가 ‘큰 언니’라고 부르는 체칠리아 할머니는 올해 86세이신데, 평소 걸으실 때에도 보조기구를 사용하시지만 농장에 나오시는 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신다. 이분보다 연세가 더 많으신 또 다른 체칠리아 할머니는 내가 ‘왕 언니’로 부르고 있는데, 농사 첫 해에는 남들에 뒤쳐지지 않게 일하셨지만 요즘은 몸이 좀 불편하시다. 또 필립보 할아버지 부부는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 번 걸어서 나오시고 계시다. 우리 ‘하늘땅 사랑농장’(www.skylandlove.org)은 이렇게 운영되고 있다.
일명 ‘다마살이’라고 하는 선별작업을 할 때에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다. 경험이 없는 많은 분들이 하시다보니 기준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본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마는 알뜰한 우리 어르신들은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도 ‘이 정도면 먹을만 하지’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하다보니 눈에 불을 켜고 말씀을 드려도 효과가 별로 없다. “자기가 사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것만 담으세요”는 내 주문이고, 대답은 시원하지만 손놀림은 대답하고는 무관하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얼굴을 붉히게 되고 “제발 주교님 드린다고 생각하고 담으세요”라고까지 사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가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동창신부 본당에 사정을 하여 고구마를 보냈는데 전화가 왔다. “이신부, 고구마 담는 것 좀 신경 더 써야지. 야, 무슨 ‘알박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을 담았냐?” 얼굴은 화끈거리고 고구마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화도 나고 슬프고 비참하기도 하고….
그 쓴소리 덕분에 교우들에게는 얼굴을 더 붉혔지만 상품성은 더 나아질 수 있었다. 어느 분 말씀대로 성당은 교우들이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하여도 욕을 실컷 얻어먹는 곳이니….
본당신부는 본당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유식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당이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믿고 따라주는 교우들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 비로소 공동체가 발전해 갈 수 있다. 그러기에 신부도 똑똑하고 유식한 교우들에게 도움을 받는다기보다 함께 해 주는 교우들에게서 용기를 얻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농장은 어쩌면 무모하게 시작하였지만 이렇게 성장해 가고 있다.
이원무 신부 (대전교구 논산대교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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