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피 적신 땅 마침내 '부활'을 맞다
3. 에도막부의 금교령 선포에서부터 1639년 포루투칼 무역선 도항(度浦)금지까지
1614년 오사카 전투 전에 막부는 전국에 금교령을 선포하여 선교사와 다카야마 우코 등을 나가사키에 소집하여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시켰다. 4개 수도회의 선교사 98명이 일본을 떠났고 47명의 사제들은 신자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일본 안에 잠복하였다.
선교사를 해외로 떠나보낸 후 나가사키에 있던 11개의 교회를 비롯한 각지의 교회는 파괴되었으나 신자들은 그대로 신앙을 지켰다. 막부는 이제 키리시탄들에게 신앙을 버리도록 종용하고 참혹한 박해를 가하는 순교의 시대로 들어간다.
오사카의 전투에서 최대의 반대세력이었던 히데요시가(家)를 멸망시킨 후 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한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와 똑같이 키리시탄의 금지를 실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표시로 1619년 교토의 키리시탄 52명을 로쿠죠가와하라에서 화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1614년 금지령 선포 이후 박해를 삼가하던 다른 다이묘들도 자신의 영내에 있는 키리시탄 박해를 시작하게 된다. 키리시탄 문제로 막부의 문책을 받아 다이묘 신분을 박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나가사키에서는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므로 키리시탄은 자연 소멸되었으리라 여겨 엄격한 문초는 없었다. 그러나 키리시탄은 소멸될 기색은 보이지 않고 선교사들은 법령을 어기고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막부는 잠복해 있는 선교사들을 은닉시킨 신자들을 찾아내어 본보기로 처형하라고 명령한 후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와 신자 55명을 체포하여 화형과 참수에 처했다. 162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겐나(元和)의 대순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잠복해 있으면서 신자들에게 성체와 고해성사를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교우들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제를 보호하고 자신의 집에 은닉시키는 것을 계속하였다.
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장군직을 이에미쯔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은퇴장군이 된다. 도쿠가와 이에미쯔는 도쿠가와 가문의 정권확립의 수단으로 키리시탄 금교령을 최대한 이용한 장군이다. 정권확립이란 전국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도쿠가와의 가문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키리시탄 금교령 의지를 밝히는 표지로 에도의 감옥에 수감된 하라몬도를 포함한 50명을 화형에 처했다.
당시 에도에는 쇼군 이에미쯔 장군의 취임축하식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에미쯔는 자신의 위엄과 키리시탄 금지령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 앞에서 50명을 처형했고 그 이야기는 즉시 전국에 퍼져나가 다이묘 영지 내에서는 박해가 격렬해졌다.
시마바라의 영주 마쯔쿠라 시게마사가 이에미쯔에게 키리시탄 박해를 게을리하고 있음을 비난하자 1627년부터 더욱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 금교령을 따르지 않는 우찌보리 사쿠에몬에게 뜨거운 열탕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나가사키에는 이에미쯔로부터 키리시탄 탄압의 특별 임무를 띠고 온 나가사키 부교(奉行, 법행정 집행관) 미즈노가와 시노가미가 부임했다. 그는 키리시탄들에게 키리시탄을 버리든가, 마을을 떠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다.
많은 키리시탄들은 마을을 떠나 추위에 굶어 죽는 순교를 택하였다. 막부는 거기다 키리시탄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상금을 주겠다는 팻말을 세웠고, 상금에 눈이 어두운 이들의 밀고로 잠복해 있던 선교사와 숨어사는 신자들이 차례차례 체포된다.
1633년 니시자카의 언덕에서는 소년사절단의 한명이었던 나카우라 쥴리안이 아나쯔리(거꾸로 구멍 매달기) 고문으로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34명의 사제와 약방 주인 미카엘과 그의 동료 46명의 키리시탄이 순교했다. 1636년에는 포르투갈 상인과 키리시탄의 관계에 의혹의 눈을 돌렸던 막부는 데지마(出島)를 구축하여 강제이주시켰다.
1636년 ‘마법을 사용한다’고 두려움을 주었던 킨츠바 지효우에 신부가 2차례에 걸쳐 아나쯔리형을 받고 순교했다. 1639년엔 로마에서 사제가 되어 잠입 귀국해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베드로 키베(?部)신부가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에도에서 이에미쯔에게 직접 문초당한 후 순교했다. 슈몬 부교(奉行) 이노우에의 기록에 “키베 베드로는 배교하지 않았다. 꼬챙이로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쇄국은 완성되었다. 무역은 네델란드와 중국 두 나라에 한하여 실시되었으며 무역권은 막부가 완전히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 셈이다. 1643년 일본의 마지막 사제 코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한 후 일본 교회는 단 한명의 사제도 존재하지 않는 ‘잠복시대’에 들어간다.
4. 잠복에서 종교자유의 부활까지
1640년대의 중반기에는 드러나는 순교사건은 없어지고 이미 키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짐작했으나 전국의 현상금 팻말과 금교령의 팻말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데리우케(寺請制度, 모든 국민은 절에 소속되는 제도)와 후미에(예수, 마리아 상을 만들어 밟게하는 일)도 계속 행하여졌다. 신자 색출을 위하여 온갖 수단 방법을 이용했으나 막부가 걱정하는 그대로 실제로 키리시탄은 잠복한 채 존재했다.
막부의 혹독한 감시제도의 와중에서도 나가사키의 각지에서 키리시탄은 잠복조직제도를 만들었다. 초카타가 전체 조직의 총 지도자로 기도, 교리를 전승했고 교회 전례력을 따라 불완전하지만 1년간의 신앙생활을 지도했다. 미스카다는 세례를 주는 역할로 키리시탄 가족의 신앙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여 한 명의 사제도 없는 가운데 신앙을 전승케 하였다.
1858년 개국을 맞아 나가사키의 외국인 거류지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은 250년만에 나가사키 땅에 다시 재건된 교회였다. 우라카미 마을(浦上村)의 키리시탄이 “우리들은 모두 당신의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푸치창 신부에게 신앙을 고백함으로 일본 교회는 다시 로마 교회와 접목하는 부활을 맞이한다.
‘키리스탄 부활’의 시대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리시탄들은 마지막 박해, 즉 우라카미욘방쿠즈레, 고토쿠즈레등의 고난을 봉헌해야만 했다.
막부는 쓰러지고 메이지(明治)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나 메이지 정부는 막부의 키리시탄 금교령을 계속 유지하였다. 우라카미 마을 전 신자가 절에 소속된 신분을 거부하자 정부는 우라카미의 키리스탄 모두를 전국 각지로 유배시켰다. 이 신앙탄압이 미, 유럽 각국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자 일본 정부는 1873년 키리시탄 금교령을 제거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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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259년만에 금교령의 폐지였다. 전국에 유배갔던 우라카미(浦上) 마을 주민 키리스탄 3384명중 613명이 유배지에서 순교했다. 고향 땅에 돌아온 우라카미 신자들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된 우라카미를 바라보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것을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기쁨으로 알고 새로운 도약을 시작하게 되었다.
“큰소리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날이 꼭 온다”고 믿었던 그 날이 온 것이다. 그날이 오면 가장 먼저 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한 성전 건립을 시작했다. 30년만에 붉은 벽돌의 우라카미 교회를 완성하여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지금, 나가사키현 안의 모든 교회에는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산다’는 선조들의 모범적인 메시지를 감사의 기도로 드리며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사진설명
1858년 개국을 맞아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역에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 오우라 천주당은 250년만에 나가사키에 재건된 교회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금교령을 철회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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