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향한 무한한 초월로 나아가라
피나는 영신 수련도 방향 잘못 설정하면 무의미
초월적 차원서 ‘영’의 능력 이용한 재형성 필요
밥은 천천히 먹어야 한다. 그래야 몸에도 좋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식당에 가서 욕심스럽게 우걱우걱 밥을 먹다 결국 일을 냈다. 이가 부러진 것이다. 그리곤 주인을 불러서 고래고래 욕설을 하고 한바탕 난리를 친 뒤 치료비를 받아 치과에 갔다.
이 사람은 치과에서 부러진 이를 다시 만들었다. 형성 신학 차원에선 이것을 ‘몸을 재형성시켰다’라고 말한다. 재형성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고, 또 앞으로도 수없이 나오는 개념인 만큼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사람이 치과 치료를 받았다고 해서 과연 재형성이 됐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몸 뿐 아니라 정신도 재형성해야 한다. 식당 주인에게 큰 소리치고 잘못을 나무라는 행동은 깨끗한 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집착과 욕심 등도 모두 재형성시켜야 한다.
물론 많은 이들이 정신적 재형성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말을 고치기 위해 오늘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성체와 십자가 앞에서 피나는 영신 수련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10년 면벽 수행도 의미가 없다.
많은 이들은 좋은 생각을 해서, 좋은 계획을 세우고,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일정 부분 성취도 이룰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영성 초심자 중에는 스스로의 노력과 몇몇 성과에 대해 큰 만족을 하는 이들이 있다. 스스로 이룩한 영적 성장, 인격 도야 등에 대해 가슴 뿌듯한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스스로가 존경 받을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성과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입장에서 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잘하려고 했던 것도 하느님 앞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을 수 있다. 이런 성향까지 모두 재형성해야 한다. 잘 했다고 생각할 때가 위험할 때다.
그래서 경지에 도달한 영성가 치고 스스로가 진정한 깊이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서 보면 깨달은 만큼 어둔밤을 더 깊이 체험하지 않는가? 잘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조심 해야한다. 스스로가 잘 했다고 생각할 때가 진정으로 위험한 때다. 깊은 신앙적 깊이에 도달했다면 일상으로 편안하게 돌아가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한다.
성경 필사를 마쳤다고 완벽한 신앙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성전 봉헌했다고 해서 자랑하고 다닐 것 없다. 가장 큰 유혹이 교만이다. 일반적으로 의사나 약사는 신체적 차원의 잘못된 부분을 재형성시켜준다. 철학이나 심리학, 교육학, 인간학은 정신적 차원의 잘못된 부분을 재형성시킨다. 문제는 마음의 재형성이다.
박테리아에서부터, 강아지, 돼지,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에게는 영, 마음이 없다. 얕은 차원의 의식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과 마음은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궁극적 계획과 궁극적인 의미,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힘이 영이다. 강아지나 코끼리는 궁극적 계획과 궁극적 의미를 모른다. 궁극적인 것을 모르니,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궁극적 목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열려야 한다.
이 능력이 열리면 모든 인간관계가 좋아질 수 있고, 세상이 변화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잘 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바로 이 능력 밖에 없다.
육신적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성장하면서 정신적으로 키워온 습성은 어린 시절 정도로 충분하다. 이제는 성인 인간으로서 완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무한한 초월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를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초월하지 않고 계속 정신적이고 육신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 정지다. 아니 퇴보다.
진정한 영성가, 성인성녀가 되는 길은 단 한길이다. 영의 능력을 쓰는 길밖에 없다. 이 능력은 정신을 어떻게 사용하라, 육신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영화된 정신. 영화된 육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월적인 차원에서, 즉 마음과 영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성향을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야(on-going formation) 한다. 그 성향은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과의 합치이자 일치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계획, 내가 하고자 하는 목적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말고, 하느님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일단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하느님 당신 뜻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다음 주에는 이 ‘하느님과의 합치’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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