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워 세상의 희망 밝힙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저는 초입니다. 성탄을 맞아 성당이나 수도회에서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대요. 저는 갈 수만 있다면 초등부 주일학교 아이들의 예쁜 손에 쥐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환하게 비춰주게요.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알려드릴게요.
▧ 공장이야기
여기는 경기도 원당에 있는 한 ‘공장’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들이 태어나요. 공장 아저씨는 ‘파라핀’을 녹여 저를 만들어주세요. 흐물흐물 녹아 뜨겁지만 저는 ‘성탄’ 초가 될 그날을 기다립니다. 좀 더 녹아야 빨리 초가 된다고 하니 인내를 가지고 참아보려고요.
제가 다 녹으면 아저씨는 색을 넣고 틀에 담아주십니다. 저는 제대 위에 놓일 초가 될 수도 있고, 꽃꽂이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머니 손에 들려 성모상 옆에 놓이기도 하고, 컵에 담겨 아이들을 바라보기도 하지요.
공장 아저씨는 저를 절대 기계로 만들지 않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작업하시거든요. 기계로 초를 뽑으면 면이 거칠거칠해지기 때문에 수제 초를 고집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아저씨의 손이 많이 닿아 기분이 좋아요.
제가 틀에 담겨 못생겼던 모습이 의젓한 초의 모습으로 자리 잡으면 아저씨는 제게 드릴로 구멍을 뚫으십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심지가 들어갈 자리라 힘껏 참아요. 면심지를 말아 촛농으로 딱딱하게 굳힌 심지는 저를 타게 할 제 안의 중심입니다. 하느님이 태어나신 날, 저는 저를 오롯이 태워 기쁨을 드리려고 해요.
저는 상당히 민감합니다. 조금만 제게 주의를 게을리 하셔도 갈라진다거나 금이 가요. 아저씨는 이런 저를 아기처럼 조심히 다뤄주십니다.
아저씨는 장애우들을 위한 자립작업장을 운영하시는 것이 꿈이라 하셨어요. 지체 장애우들이 저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것이 저를 통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저씨는 또 ‘내가 만든 초를 가지고 신자들이 기도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이 내게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신대요. 이번 성탄에 저는 아저씨의 꿈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아, 저를 배달해주실 시간입니다. 저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또 누구를 만나게 될까요.
▧ 바오로 선교회
한참을 실려 도착한 곳은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입니다. 저는 4층 바오로 선교회에 도착했어요. 눈을 떠보니 장애우 아저씨들이 밝은 웃음으로 저를 맞이해주십니다.
아저씨들은 제 몸에 예쁜 그림을 붙여주신대요.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아저씨들은 몸이 불편하시지만, 저 같은 초들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오셨대요.
한지에 그림을 그려 아저씨들이 색칠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10년차, 20년차, 27년차 되신 아저씨 세분의 색칠 솜씨는 기가 막혀요. 포도 한 알, 한 알을 얇은 붓을 들어 그렇게 정교하게 칠하실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아저씨는 요셉과 마리아, 아기예수님의 모습을 색칠하십니다. 마구간에 말이 ‘히힝’하고 웁니다. 성탄용 그림인가 봐요. 저 그림이 제 몸에 입혀질 생각을 하니 정말 행복합니다.
김기호(바오로·41) 아저씨는 “모든 신자들이 주님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좋은 일로 가득한 세상이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저씨가 만들어주신 제가 이제부터 예수님의 기쁜 탄생을 알릴 것이니 걱정하지마세요.
아저씨가 인두를 들어 제게 그림을 붙이십니다. 마구간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 그림이네요. 정성스럽게 인두로 쓱싹쓱싹 문지르십니다.
제 몸이 녹습니다. 기분 좋은 뜨거움입니다. 제 몸이 녹아 그림이 새겨지듯 성탄절을 맞은 여러분들의 신앙도 여러분 몸에 녹아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아, 예쁜 초등부 주일학교 학생이 저를 손에 쥐었습니다. 제 심지에 불이 켜졌어요.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신앙에도 불이 켜졌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사진설명
▲"아빠와 초 만들었어요." 예쁜나라 초공장 사장 이명규(야고보)씨가 아들과 함께 초를 들고 웃고 있다.
▲①파라핀을 녹여요
▲②틀에 굳혀요
▲③심지구멍을 뚫어요
▲④심지를 넣어요
▲⑤초를 포장해요
▲⑥무늬를 그려요
▲⑦무늬를 붙여요
▲⑧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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