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소임 알려면 주님과 대화하라
하느님 향한 영적 생활 안 하면 ‘내 것’에만 집착
영적 성숙 위해 세상·이웃을 이해·용서로 감싸야
하느님과의 합치를 이야기할 때 이 ‘합치’(congeniality)의 성향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하느님과 닮은 꼴로 지어졌다(창세 1, 27 참조). 그래서 합치란 하느님 안에 있는 원천, 기원(genesis)에 대해서 신실하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찾아서 그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합치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하느님 안에서 머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쉽게 말해 합치란 ‘계속해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 계속해서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소명이 무엇인지, 내 삶의 궁극적 소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묻지 않고 추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 행동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지닌 생의 궁극적 목적과 소임을 알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 실천하지 않으면 일치할 수 없다.
우리는 성당에서 다양한 ‘행사’를 한다. 그것이 성전 봉헌식이 될 수도 있고, 레지오 마리애 도입 50주년 행사가 될 수도 있고, 본당 설정 20주년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행사가 단순한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묻지 않고, 깨닫지 않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행사의 궁극적 목적과 소명을 깨달아야 한다. 행사를 하느님 뜻 안에서 치러야 한다. 인간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느님 뜻 안에서 살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가장 위험한 상태다.
우리는 존재의 깊은 곳에 있을 때 진정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즐겁고 흥겨운 상태를 편안한 상태로 오해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해서 그 일을 성취했을 때 자칫 우리는 나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본당 설정 20주년을 맞아 큰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친교도 필요하고, 나 자신의 노력 때문에 작은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자부심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감정적이고 육신적 차원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편안함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다. 정신적 차원의 평안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은 늘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하고, 집착하기에 그 평안은 일시적인 것이다.
하느님과의 합치를 위해선 먼저 ‘Who am I’(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마음의 두번째 단계인 융화(compatibiliyt)의 성향이 일어난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합치의 성향이 없으면 인간은 금방 욕심을 부리게 되어 있다. 소유하고 싶고, 내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다 보니 모두 다 내 차지를 만들고 싶어 한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융화가 이뤄질 수 없다. 융화란 우리가 구축할 삶의 형태와 합치된 상태를 견지하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여기서 그리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과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과 함께 편안하게 있는 것을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웃들과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불평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합치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하느님과 합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중심의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하다 보니, 자꾸만 나 자신의 것만 강화된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편안할 리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권력이 높다고 해도 편안하지 않다.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고 세상 것에 욕심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이웃과 편안하게 지내는 융화의 성향을 잘 닦아 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흠들, 연약함들을 갖고 있다는 철저한 자기 인정은 마음의 세번째 단계인 연민(compassion)의 성향에 가 닿는다. 영적 성숙을 이뤄 성장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육신과 정신에만 갇혀 생활한다면 이기적인 자아 발양의 성격만 키울 뿐이다.
나도 부족하고 이웃도 부족한 인간이기에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못한 병자임을 깨닫고 자신과 이웃을 연민 나아가 자비의 마음으로 대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연민의 성향은 인간관계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지금까지 말한 하느님과의 합치, 융화, 연민의 성향은 모두 세상을 향한 역량(competence)의 성향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그 역량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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