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해도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타야 한다. 그것도 차례대로 순서를 지켜서 말이다. 압해도에서 나가는 배는 여유가 좀 있는 편이지만, 목포 ‘북항’에서 압해도로 들어올 때는 그렇지가 못하다. 신안군의 모든 섬을 운항하는 배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복잡함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순서를 지키지 않는 얌체족들 때문에 순서가 엉키기 일쑤였다.
나는 신부가 먼저 타겠다고 채신머리없이 촐싹대는 것이 품위 없어 보일까봐, 늘 나부터라도 순서를 지킨답시고 점잔을 빼고 뒤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그러나 나보다 늦게 온 차들이 순서도 지키지 않고 계속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새치기가 아주 당연시 묵인되고 있었다.
몇 번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신부 체면에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따끔하게 한마디 할 필요는 있겠다 싶어 선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먼저 와서 기다리던 사람은 챙겨주지도 않고, 무조건 들이미는 사람부터 태우면 어떻게 합니까? 누구는 새치기 할 줄 몰라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선원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니 이 양반아, 당신이 제일 먼저 이곳에 왔는지 어떻게 알아요? 탑승 신호가 떨어지면 빨리빨리 차를 승선시켜야지 먼저 왔다고 뒤에서 점잔빼고 기다리면 됩니까?”
아뿔싸. 이번에는 나도 서둘러서 차를 승선시켰다. 그것도 1등으로 말이다. 제일 먼저 배에 오르니 주차하기도 편하고 제법 여유가 생겼다. 나름대로 기다린 시간도 길었고, 또 순서를 지켰으니 신부로서의 품위도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반대의 상황이 왔다. 압해도에 도착하고 나니, 늦게 배에 오른 차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승선과 하선은 정확히 서로 반대의 순서로 이뤄졌다. 결국 제일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몇 번 겪다보니 이제는 요령이 생긴다. 턱걸이 하듯 힘들게 정신없이 겨우 배를 타면, 내릴 때는 제일 먼저 내릴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온다. 반대로, 먼저 배를 타고 여유를 즐긴 후에는 내릴 때 제일 마지막으로 쫓기는 마음으로 서둘러야 한다.
문득 이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마태 19, 30)는 복음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가는 우리 모두에게 고루 내리시는 하느님의 은총, 바로 ‘하느님의 계산법’이시다. 일전에는 그저 평범한 성경 구절이라 생각했던 말씀이,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으로 내 몸 안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하느님! 이 귀한 말씀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는 압해대교가 놓이면서 배를 탈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뱃길은 압해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소중한 길이다. 또 하나, 뱃길은 사제인 내게 ‘신앙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게 해준 살아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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