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가야 한다…."
75세의 한 노인이 천막 안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분명히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노인은 며칠 전 기도 중에 하느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 한참동안 고민하던 노인이 양 팔을 무릎에 짚고 일어섰다. 결심이 선 듯했다. 천막 입구에 드리운 휘장을 걷고, 밖으로 큰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리고 아내 사라와 조카 룻을 비롯해 거느린 종들을 불러 세우고 말했다.
“이제 떠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짐은 가능한 줄이고,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라. 내 앞길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다.”
4000년 전, 작은 한 부족을 이끌던 노인, 아브람이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의 동쪽 끝에서 내린 결단 하나가 오늘날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가능케 한다. 특히 유대인의 역사는 이렇게 한 노인이 가족과 거느리던 부족을 이끌고 번성하던 도시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브람의 결단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한 마리아의 순명을 닮았다. 노구(老軀)를 이끌고 미지의 땅으로 향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렇게 그는 모든 하느님 백성의 맨 앞줄에 우뚝 선다.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한민족의 조상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면, 유대인들의 조상은 아브람이다. 2009년이 단기 4342년이니까 유대인과 한민족의 역사는 비슷한 시점에 출발하는 셈이다. 유대인과 한민족은 출발에서도 그렇지만 살아온 모습도 닮은꼴이다. 두 민족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주위에 둘러선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실제로 오랜 이민족의 지배도 받아야 했다.
다른 민족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종교적·영성적 성향도 비슷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전쟁 나간 아들과 남편의 무사 귀환을 위해, 늘 장독 위에 정화수 떠 놓고 두 손 비비며 천지신명께 빌었고, 유대 어머니들도 늘 하느님의 계약을 믿고 기도했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향한 긴 여정을 떠나려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단순히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닌 인류의 구원사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온통 나자렛 예수가 구약성경에 예고된 약속을 성취한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배반하고 돌아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새 계약’(예레 31, 31~34)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대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hic et nunc) 필요한 이유다.
‘유대인 이야기’를 기획하면서 용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유다인’인가 ‘유대인’인가하는 문제였다. 대부분 가톨릭교회 학자는 ‘유다’라는 낱말을 아무런 구분 없이 국가명, 지방명, 민족명, 인명, 종교로 두루 적용해 왔다. 야곱의 아들 유다, 통일 왕국 분단 이후의 북 이스라엘과 구분되는 의미의 유다 왕국, 팔레스티나 남쪽을 의미하는 지방 이름 등으로 유다가 함께 사용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유다주의’ ‘유다를 넘어서’등의 의미가 모호해진다. ‘유다가 유다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유다 왕국과 유다 지역을 배경으로 글 쓰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 가톨릭대 하성수 박사(고대교회사, 교부학)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신약성경과 그 이후에 사용된 지방명은 유대아, 인명은 유다스가 주로 사용되었다. 하 박사에 따르면 이 명칭은 오늘날 각국의 현대어와 우리나라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굳이 가톨릭교회만 이 용어를 게토화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새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명은 ‘유다’ 및 ‘유다스’, 지역명은 ‘유대아’, 민족명은 ‘유대인’, 종교명은 ‘유대교’로 사용키로 했다.
하느님은 유다인이 아닌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 33). 그 ‘약속의 역사’로 이제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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