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탈출 3, 4).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가방하나 둘러메고 먼 길 훌쩍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은이 아니다. 그렇게 일상을 툭툭 털고 일어나, 거룩한 땅에 도착했다. 이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았다는 그 산으로 간다.
시나이 산(山). 부르셨으니까. 아니 불렀다고 믿으니까 간다.
#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갔다(탈출 19, 20).
새벽 2시. 세상이 온통 검다. 손전등의 작은 빛마저 없다면 장님이 되어야 한다. 간신히 눈앞만 볼 수 있는 상황. 그 어려움을 가르며 수 천년동안 수도자들이 하나 둘 쌓아 만들었다는 4000여개의 돌계단을 오른다. 이 계단이 바로 모세가 걸었다는 ‘모세의 길’이다.
2285m. 1500m 지점에서 출발했으니까, 정상까지는 빠른 장정 걸음으로는 1~2시간, 할머니가 천천히 쉬어가며 오르면 4시간이 걸린다. 잡다한 세상사가 하나 둘 스쳐간다. 세상일들을 마음으로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그렇게 산을 올랐다. 천천히 걷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뭐든 들어주지 않는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랜만에 나선 산길. 몸이 힘들어 한다. 호흡이 서서히 빨라온다. 다리 근육도 아리다. 산이 굽이치면 펴지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평탄한 길로 이어지는 맛이 있어야지…. 시나이는 그저 계속 오르기만을 재촉한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아래로 내려 양 무릎을 짚는다. 앞서가던 수녀님도 힘들어 하신다.
▲ 시나이 산 전경.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탈출 19, 21).
이상한 일이다. 몸이 가장 힘들어할 즈음, 시나이 산 정상이 새벽 여명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고, 또 힘들고, 끝까지 힘들고’는 없나보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신은 그 기력이 쇠할 무렵 희망을 보여 주신다.
시나이 산도 그랬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정상에 올라서면서 큰 숨 한번 내쉬었다.
눈 아래로 세상이 펼쳐진다. 아직 태양은 솟지 않았지만 어둠은 이미 반쯤 그 위세에 눌려 저만치 물러서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붉은 색의 향연이다. 오전 6시15분. 세계 3대 일출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그 장관이 연출됐다. 탄성이 주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동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시나이 산의 골짜기를 속속들이 비춘다. 그러고도 남은 엄청난 양의 여분의 빛이 멀리 세상 끝까지 달려 나간다. 어쩌면 빛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비춰줄 산이 있기에 빛이 의미를 지니는 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빛에 담았다. 침묵 속에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천천히 걸어가기를, ‘다름’을 보듬을 수 있기를, 뜨거운 열정이 식지 않기를 소망했다.
# 모세는 백성에게 내려가 말하였다(탈출 19, 25).
발이 공중에 뜬 듯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왔다. 이제야 산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오를 때 어둠에 사로잡혀 미처 보지 못한 탓이다.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 시나이는 편안하다. 굽이치는 물길의 장중함도, 수많은 동물과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함도,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려는 완고함도 없다. 그저 그렇게 애초에 편안함 모습으로 그곳에 있다.
4000여 개의 계단은 시나이 산 어귀에 있는 성(聖)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끝났다. 수도원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발현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떨기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 두 손 모으고 편안히 앉았다. 그리고 성경을 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 가겠다”(탈출 19, 9).
▨ 시나이 산(山)
거룩한 땅, 시나이 산은 구약성경의 중심에 우뚝 선 ‘큰 산’이다. 이집트인을 죽인 모세는 미디안(시나이 반도)으로 피신한다.
모세는 이곳에서 결혼, 장인의 양떼를 돌보다가 하느님의 산 호렙산(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뵙는다(탈출 2~3장 참조). 성경에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 5)라고 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정교회 사제들은 시나이 산을 오를 때는 신발을 벗는다.
이후 하느님의 지시대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탈출한 모세는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는다(탈출 19, 3 20, 1~17 참조). 시나인 산은 또 훗날 엘리야가 이제벨 여왕을 피해 도망쳐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1열왕 19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