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에 응하는 네 번째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는 첫 단계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마음을 여는 작업을 했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에로 우리 마음을 열고, 이웃과 현재 살고 있는 상황 그리고 넓은 차원의 세계상황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렇게 마음을 열기 위해 우리는 세 번째로 귀를 여는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네 번째 단계인 언제 어디서든‘예스’(Yes)를 응답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예스’(Yes)다. 하지만 이렇게 ‘예’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내가 원하는 일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기는 쉽다. 하지만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느님의 뜻은 대체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체적 차원이 있고, 정신적 차원이 있고, 더 나아가 영적인, 초월적 차원이 있다고 했다. 마라톤 선수를 예로 들어보자. 우선 튼튼한 육신이 있어야 한다. 정신과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튼튼한 육체가 없다면 마라톤을 할 수 없다. 마라톤을 위해선 또 여러 가지 지성적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보폭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지, 어떤 장소에서 승부수를 띄워야 하는지 모두 정신적 면에 속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튼튼한 육체와 이성적 연구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마라톤에는 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 마라톤에는 한계 상황이 있다. 40킬로미터와 같은 한계상황에 도달하면 인간 능력은 그 한계를 넘어선다. 이럴 때 영적인 차원,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힘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생체적, 정신적, 영적(초월적) 능력을 모두 사용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예’라고 말할 때도 우리는 생체적, 정신적, 영적 차원에서 항상 귀를 열어야 한다.
하느님은 늘 다양한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청하고 계신다. 밥 먹는 것 그 자체도 큰 사건이라고 한 일이 있다. 길을 걷는 것도 평범한 것 같지만 장애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큰 사건이다. 삶의 매 순간 순간이 하나의 사건이다. 그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인간은 세상의 수많은 잡음들 때문에 이러한 하느님의 호소를 듣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산다.
삶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선 우리들에게 늘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작은 속삭임에 대해 늘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큰 소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작은 하느님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다. 하느님은 큰 소리로 소리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일하는 방식은 평화로움 가운데 있다. 하느님은 늘 고요함 속에서 일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소란함 속에 묻혀 살아간다. 조용히 성체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조용한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온통 혼란과 잡음과 망상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평화와 행복은 조용함 속에서 오는데, 하느님은 조용함 속에서 우리에게 말하시는데, 우리는 정작 시끄러운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은 별다른 성찰 없이 그저 흘러가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정해져 있는 매일의 일과 속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루하루를 펼쳐 살아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하느님의 현존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너무나도 시끄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요한 시간이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평화로 인도하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고, 또 실제로 평화를 원하지만 정작 평화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우리가 육신적인 차원에서 정신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세상은 늘 나를 육신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신앙은 육신에서 정신을 거쳐서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신적 차원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신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그 첫 발걸음은 조용히 무릎 꿇고 ‘예’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