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새해가 밝았다. 가톨릭신문은 새해를 맞으며 교회 어른들의 사목적 제언을 교회 공동체와 함께 나누고자 신년 릴레이 대담을 마련했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를 만났다.
▣ 일시 : 2008년 12월 4일
▣ 장소 : 주한 교황대사관
▣ 대담 : 본지 이상재 주간 신부
- 먼저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6월 주한 교황대사로 부임해 오신 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개인적인 소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교황님의 뜻에 순명하며 지난 6월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으니, 벌써 이곳에 온 지도 6개월이나 됐습니다. 한국에 오니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행복합니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한국 신자들의 깊은 믿음과 신앙심, 그리고 그들의 선한 마음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훌륭한 신자들로 이뤄진 한국 교회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한국 신자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섭리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 순간이 은총의 시간입니다.
-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에서 교황 성하를 대리하는 대사로 활동하면서 지켜본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셨습니까? 특히 지금까지 듣고 생각해 온 한국 교회와 실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비교해 주신다면.
▲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성장했습니다.
평신도의 힘으로 교회가 시작됐고, 오늘날에도 평신도의 역할이 대단합니다. 또한 많은 박해를 받았고, 순교 성인들의 피땀 위에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는 세계교회사에서 좋은 선례가 됩니다.
사실 한국에 오기 전, 저는 한국 교회에 대한 약간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록 저 역시 아시아 출신이지만,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머물렀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기 전에는 한국 교회의 발전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그런 의심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은총 덕분입니다.
교회는 공동체가 속한 지역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입니다. 전 세계에 거주하는 우리 믿는 이들은 같은 미사와 같은 성사,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가톨릭교회만이 가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 한국에 오신 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성무활동에 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이어오는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한국 신자들의 교황님에 대한 사랑이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교황님께 존경의 뜻을 표하고, 교황님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 신자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어느 곳을 방문하든, 제가 교황대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먼저 미소를 머금고 다가와 축복을 청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유무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선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그러셨듯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한국 교회를 잘 알고 계시며,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수많은 한국 신자들이 교황님의 방한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교황님의 방문을 기다리는 전 세계 100여개 나라 가운데 한 나라입니다. 교황님께서 하루 빨리 한국을 방문하시길 다 같이 기도드렸으면 합니다.
- 한국에서 교황대사로 활동하면서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사목 영역이나 방향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입니까.
▲ 교황대사는 국가와 지역 교회에 대해 교황을 대리하는 직무입니다. 교황과 각 지역교회, 교황청과 각 교구 관계를 굳건하게 하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일을 합니다. 저 역시 한국 교회의 하느님 백성들에게 봉사하고, 한국 교회와 교황청간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주한 교황대사로 왔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교황님을 한국에 더 많이 알리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 안팎의 지성인과 경제인, 정치인들은 물론 젊은이들과도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황님의 가르침을 직접 전달했습니다.
저는 또한 이주민들을 위한 사목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주민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 선진 국가에서 계속해서 늘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선진국으로 모여드는 것도 일종의 ‘세계화’입니다.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류하면서 상호이해와 개방성이 요구됩니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은 법적, 물질적, 종교적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형제적 사랑으로 보살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짧은 역사 속에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 안에서도 적잖은 몫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삼천년기를 맞은 교회 안에서 특별히 한국 교회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한국 교회는 격동의 역사를 보내며 근대사의 십자가를 지게 됐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남북통일’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의 상황이 전반적으로 개선되어야 합니다. 교황청에서도 이런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교황님께서는 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한국 교회도 주교회의 차원에서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북녘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최대한 도와줘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통일을 염원해 온 오랜 기도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한반도를 축복하실 것이고, 언젠가 통일의 기쁨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미 보편 교회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꼭 남북통일을 이뤄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더 큰 역할을 맡아주길 바랍니다.
- 교회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특별희년 ‘바오로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크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도 현실입니다. 희년의 정신을 맞갖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특별희년 ‘바오로 해’는 성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을 본받기 위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도 ‘바오로 해’의 선포 취지를 “사도 바오로의 삶과 영성을 본받아 인류복음화에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기 위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열정에서 기초한 것입니다. 지독한 박해자였던 사도 바오로는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일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신앙과 삶의 모범은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오로 해’가 막을 내리는 2009년 6월까지는 약 반년이라는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모두는 바오로 사도의 생애와 사상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그의 선교 영성을 실천에 옮기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한국 사회 한가운데 서 있는 한국 교회도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일치와 화합보다는 분리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 대표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원칙과 자세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 모두는 천상이 아닌 지상을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현실적 문제에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낼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사랑’에 대해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을 따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물질주의와 배금주의가 힘을 얻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 안에서 교회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생명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례로 유력한 신자들 가운데 사형제가 존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생명에 대한 올바른 입장은 무엇이며, 생명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현대사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경향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도 물질주의와 세속화 경향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는 영적,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열망만이 앞서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신적인 가치가 배제된 물질주의에는 어떤 영혼도, 의식도,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보편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항상 생명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왔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은 임신의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사형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교회도 한국 교회의 이런 좋은 면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특별히 근래 들어 교회 안팎으로 세속화 문제가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로 인해 복음의 빛이 약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와 신자들이 어떤 자세와 입장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 속 교회입니다. 세상 속 교회는 인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지속적인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신앙인들은 인간적인 안락함이나 편안함에만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적인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 중 하나로 신자들의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하느님 나라를 만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닌, 단지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교회를 찾아오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 없이 교회에 드나드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받은 은총입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부담감이 거부감을 느끼는 신자들이 계시다면, 기도에 매진할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기도 하십시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신앙은 저절로 되살아납니다.
- 새해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해를 맞으며, 보편 교회의 일원으로 한국 교회가 특별히 2009년 한 해 동안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굳건히 지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미래이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어지러울수록, 신자는 물론 미신자들도 교회의 영적 가르침에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급속한 물질적 번영에 따라 미움과 증오, 정신적 황폐함이 번지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나서 올바른 이정표를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교황님의 올해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를 살펴보면,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를 건설하는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와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더 넓은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실제로 그들을 돕는 가능한 모든 일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도 진정한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갈 것임을 믿습니다.
- 끝으로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때론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잊거나, 당신을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이들마저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그 분은 참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새해에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두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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