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기에서 초월·영성적 삶 택하라
한 여성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연히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고, 그래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많은 남성 중 하필이면 그 사람을 ‘왜’ 그리고 ‘어떻게’만나게 되었을까.
출산도 그렇다. 여성이기 때문에 그냥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왜 나를 통해서 이 아이를 주셨는가. 하느님은 왜 아이를 낳을 능력을 나에게 주셨는가를 묻는 이들은 거의 없다.
취직을 하면, 과연 나 스스로의 능력이 출중해 취직한 것일까, 하느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능력을 주셔서, 이 직장에서 일하도록 하셨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렇게 생활한다. 매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습관적으로 바라보며, 반복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1년,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읽은 신문이 있고, 책이 있다 보니 지적 능력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 인간의 모습은 마냥 그 수준에 머물고 만다. 1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마찬가지다. 수도원에서 10년 넘게 수련한 수도자가 입회 당시 보다 오히려 영성적으로 퇴보한 모습을 동료들 삶에서 많이 보아 왔다.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하루 하루 터벅터벅 무의미하게 걸어가다 보니, 하느님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늘 가까이 만날 수 있을까. 일단 만나야 이야기를 듣고 또 “예”라고 응답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놀랍게도 하느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바로 옆에서 손짓해서 부르신다. 그 손짓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이웃과의 교류를 하고 있는데, 이 상황은 늘 바뀔 수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 있던 한 청년이 길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면 이 청년은 새로운 교류 형태로 들어간다. 군대를 갈 수도 있고,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이때 하느님은 손짓하신다. 우리가 상황이 바뀐 환경에 처하고, 또 성장할 때 마다 하느님은 손짓하신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느님을 뿌리치고 혼자 간다. 하느님과 몸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느님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당에 있어도 하느님은 멀리 계실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 분주한 생활을 접고 잠깐 멈출 수 있다. 이때도 하느님은 손짓하신다. 행복과 성공이 성취된 듯 보이는 70대 한 노인이 나는 그동안 ‘큰 무엇’을 잃어버리고 평생동안 살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께서 손짓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충격적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 속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손짓하신다. 살다보면 아이가 심하게 다칠 수 있다. 강제 퇴직을 당할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해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 결혼생활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도 있다.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심각한 질병을 앓을 수도 있다. 사기를 당해서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한계상황에 직면하는 이때도 역시 하느님은 손짓을 통해 삶의 깊이 있는 성찰로 유도하신다.
예상치 못하는 이 위기상황은 우리를 위축되게 한다. 이것을 나는 ‘초월 위기’(Transcendence Crisis)라고 부른다.’
살다보면 위기상황을 맞게 되어 있다. 위기 없는 인생이 어디 가능이나 한가.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서 좌절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을 만난 의미가 없다. 위기, 위험을 위험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반형성적인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형성하도록 심어 놓으신 그 초월적인 성향을 기르지 않는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육신적, 정신적 삶이 아니다. 초월적, 영성적 삶이다.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교 성인들, 과감하게 진리를 증언한 예언자들은 모두 육신적, 정신적 삶이 아닌 초월적, 영성적 삶을 살았던 이들이다.
이렇게 초월 위기(인생의 중요한 위기들)를 맞은 인간은 두 가지 선택 가능성 앞에 놓여있다. 위기를 위험으로 보고 반형성적 선택(Deformative Option)을 할 수도 있고, 위기를 기회로 보고 영적으로 형성적 길(Formative Path,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미리 형성해 놓은 초월에로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선택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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