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성찰하고 머물면 ‘형성의 길’ 발견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는 세상은 암흑이다. 세상은 그 어둠 속에서 꼭꼭 몸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면서 세상은 ‘천천히’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태양이 떠오를 때도 처음에는 붉은 기운만 솟아오르다가, 시간이 흐르면 마침내 자신의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던 것이, 암흑 속에 있던 것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도 마찬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느님의 뜻은 처음에는 파악하기 힘들고 애매모호한 상태로 시작한다. 하지만 서서히 태양처럼 밝아져 명확해 진다. 처음에는 볼 수 없다가 나중에서야 우리는 태양의 존재를 직시할 수 있다. 여기서 기다림의 영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기만 기다린다고 해서 홍시가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주의’(Attention)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초대와 도전, 호소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형성사건(하느님께서 미리 당신께로 형성되도록 마련해 놓으신 사건)의 더 깊은 표지들을 볼 수 있다. 하느님 신비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들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많은 위기들이 다가온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가슴아픈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많은 의도하지 않는 사건들 속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스로 ‘사정’(Appraisal) 활동을 해야 한다. 마치 정부의 사정 기관이 하급 기관들을 감사해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고치게 하듯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사정’을 통해 늘 형성 사건을 성찰하고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스스로의 사정활동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경외’(Awe)와 ‘주의’(Attention)다. 2주 전에 언급했지만 경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에 대한 경탄이다. 동시에, 하느님 뜻에 어긋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의는 이 경외의 성향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나오고 성장한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느낄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더 하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다. 바로 ‘머묾’(Abiding)이다. 우리는 경외와 주의 속에서 머물러야 한다. 머묾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 마음의 성향은 우리가 판단을 내리기 전에 꼭 실천해야 할 영적인 예비단계이다. 이는 권투선수가 시합하기 전에 준비운동을 한다거나, 식사하기 전에 영적인 식사기도를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경외와 주의, 머묾은 결국 ‘파악’(Apprehension)으로 귀결된다. 여기서는 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다. 경외와 주의, 머묾을 통해 우리는 정신을 통해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마치 어둠 속에서 태양의 존재를 모르듯 그렇게 모르고 있었던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하느님 사랑의 광대함을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은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로 보인다. 조화롭지도 못하다. 누구나 큰 불이익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하느님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경외, 주의, 머묾을 통해 접근한다면 상황 자체가 변한다.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여러 상황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의 사정과정에 있어서 결정적 전이점에 도달하게 된다. 마침내 반 형성적인 길에서 ‘형성적인 길’(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미리 형성해 놓은 신비로의 길)로 움직여갈 수 있다.
우리가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 한다면 우리는 명백히 희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조차 희망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고 참으로 그 안에서 영적 성숙을 향해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부조화와 상처, 실망, 갈등이 형성하는 신적 신비(이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의 신비로 형성되도록 초대하신 하느님)와 함께하는 ‘조화’를 향해 움직여 나가기 시작한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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