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요, 당신은 이겨낼 수 있어요”
‘세계 병자의 날’(2월 11일)은 병마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며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되새기는 날이다.
2009년 ‘제17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에서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최대원(요아킴·73·서울 개포동본당)·정금자(안나·72) 부부를 만났다. 그들의 눈물겨운 투병·간병 일기를 통해 난치병 환우들의 고통과 아픔을 되새겨보고, 병자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 남편의 투병일기 1
햇수로 벌써 4년째다. 2006년 6월, 담도암으로 시작된 병상 생활. 갈수록 살이 빠져 급기야 앙상한 뼈만 남았다. 고통과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다. 다만 아내가 걱정이다. 병간호에 지쳐 있는 아내가 자꾸 눈에 밟힌다. 눈물이 많은 아내다. 평생 동안 나를 이해해주고 따라와 준, 하느님이 맺어주신 나의 반려자다. 아내는 이렇게 초췌하게 변한 모습을 보고도 내가 제일 멋지단다. 홀로 남겨질 그를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짜증을 내버렸다. 신경을 너무 많이 썼나보다. 살아있을 때 아내를 더 행복하게 해주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또 짜증을 내버렸다. 극한의 고통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나도 병을 얻기 전 본당 빈첸시오 활동과 원목실 봉사를 통해 수많은 병자를 돌봤다. 그래서 간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괜찮아요. 당신은 이겨낼 수 있어요 힘내요.”
속이 상할 법도 하건만 되레 용기를 주는 아내의 모습에 괜스레 슬퍼진다. 오히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인데…. 못난 나를 만나 평생 고생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병수발까지 들고 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의 위로와 격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아내의 간병일기 1
남편은 돼지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투병 중에도 돼지고기를 자주 찾았다.
“먹게 좀 내버려 둬!”
“안돼요! 이젠 채식만 해야 한다는 말 못 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매몰차게 굴었다. 병원을 가지 않겠다며 고집피울 때도 난 매정했다. “당신은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왜 자꾸 입원시키려고 해!”
“치료를 받아야지 더 오래 살 수 있어요. 당신은 내 맘을 왜 그렇게 몰라주는 거예요.”
화를 참지 못하고 남편을 몰아세우곤 했다. 그러나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내가 약해지면 남편은 더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담도암 수술을 받은 지 열흘도 채 안 돼 남편이 봉사활동을 나가겠다고 했다. 평생 남편과 봉사활동을 해왔지만, 그 때 만큼은 말리고 싶었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은 채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그가 미웠다. 암이 장으로 전이돼 2차 수술을 받았던 200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당신 몸 좀 챙기라고 울부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은 그에게 있어 전부였다. 봉사활동만 나가면 즐거워했다.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나 보다. 후회가 된다. 그때 더 많이 격려하고 함께 해 줬어야 하는데….
이젠 그의 바람대로 따르고 싶다. 지금 와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일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 밖에 없다. 욕심은 없다. 그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남편이 같은 병실을 쓰는 한 환우를 천주교 가족으로 이끌었다. 웃음이 난다. 문득 하느님께서 남편을 이끌어 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께서 손수 돌봐주신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그는 많이 편안해 보인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사람도 많다며 늘 괜찮다고 한다. 그가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갖고 있어 다행이다.
# 남편의 투병일기 2
병마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 누구도 찾아온 병마를 비켜갈 수 없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병이 찾아오면 어느새 독을 품고 그분께 대들게 된다.
“왜 하필 접니까. 도대체 왜.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요”
그때서야 주님을 찾는다. 원망하며 주님을 찾는다. 반항과 항변이 원망으로 변해갈 즈음 가족들도 그분과 협상에 나서게 된다.
“이제부터 뉘우치고 올바르게 착하게 산답니다. 낫게 해 주세요.”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요. 당신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좋습니다. 낫게만 해주신다면, 남은 삶은 가난한 사람들 위해 살겠습니다.”
삼성의료원 원목실 봉사를 하던 때다. 환우들은 늘 내게 같은 소리만을 했다. 그들은 착한 사람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멀쩡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난 그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하느님의 뜻을 찾길 원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도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주시는 걸까? 그저 두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하고 아픔을 나누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내가 병자가 됐다. 지금도 혼란스럽다.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고 매달리는 환자들을 외면하시는가. 병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일까?
# 남편의 투병일기 3
나는 환자다. 그것도 난치병 환자다. 담도암은 나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암은 장으로 전이돼 2차 수술을 받아야 했고, 상황은 더욱 악화돼 갔다. 이어진 3차, 4차 수술. 이젠 움직일 수도 없고, 음식도 먹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의사소통과 팔을 움직이는 게 전부다.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다. 모두들 절망적인 말만 되풀이한다. 얼마 살지 못할 거란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다. 아니 행복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내 곁에 있다. 아직도 왜 내가 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극한의 육체적 고통이 다가올수록, 무언가 조금씩 깨닫게 됐다. 난 고통이 심해질수록 하느님께 더 의지했다.
그렇다. 그건 바로 ‘고통의 신비’였다. 인간의 일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신비. 아플수록 맘이 편해진 건 그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고통에 괴로워할 때, 항상 옆에서 함께 아파하셨다. 그 분은 늘 내 곁에서 내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리고 난 병상 생활을 통해 또 한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내 아내다. 아내는 내게 용기와 격려, 희망을 주는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와 같았다.
내 삶을 되돌아 본 것도 고통을 통해서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병마와 고통은 나를 영적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미천한 나를 하느님과의 온전한 화해로 이끌어줬다.
고통의 신비…. 예수님도 그러셨겠지. 십자가에 못 박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신비를 전해주신 예수님도 분명 그러셨겠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던 순교자 또한 그러셨겠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희귀난치성질환(The rarity incurableness disease)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약 5,000가지 이상으로, 환경적 유전적 요소로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질환별 환자 수 등 정확한 현황조차 파악되지 못한 상황이다. 한 전문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희귀난치성 질환만 110여종에 이르고, 환자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는 정도다.
희귀 난치병 환자는 뚜렷한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린 환자들은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고통일 뿐 아니라 엄청난 치료비에도 절망한다. 호소하는 통증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 사용이 불가피하지만 여의치 않다. 유병률이 높은 100여군의 희귀난치질환에 대해서만 보험적용 대상이 될 뿐 전체 몇 종류가 있는지 파악이 안 된 상태로 200여개에 속하지 못한 희귀난치질환의 경우 보험적용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집을 팔아도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로 인해 병원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고 경제난에 가족과의 다툼도 빈번해지기 마련이다. 간병비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난치병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해 24시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간병비 부담 때문에 배우자나 부모가 그 역할을 하다 보니 일을 하지 못하게 돼 수입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전문가와 원목사제들은 “무엇보다 말기환자들을 체계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완화의학의 적극적 도입과 치료 및 약물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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