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의 삶을 들여다보자.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다. 상상할 수 없는, 인간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은 굳은 믿음 안에서 ‘예!’(Yes!)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하느님 안에서 ‘머묾’을 통해 기다리는 것이다. 이 성모님의 머묾은 형성의 장(세상)에 대한 ‘주의’속에서 이뤄진다. 면밀하게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며 기다렸더니, 요셉이 찾아와 위로도 하고, 파혼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몇 가지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렇게 해서 성모님은 하느님 뜻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대부분 신자들이 알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불공명’의 상태다. 2주전 글을 통해 나는 불공명이란 ‘조화롭지 못한’ ‘이해하지 못하는’‘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라고 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느님을 따름으로 인해 생기는 불공명 상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예!”라고 말해 놓고도 그 “예!”로 인한 불편한 결과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내가 “예!”라고 말했으면 그에 합당한 행복한 결과들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하느님을 열심히 따르는데 왜 이런 고통이 생기지?’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사는데 왜 사람들은 나를 비판하지?’라고 생각한다.
성모님은 심각한 불공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시키는 것에 대해 “예!”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상 성모님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세주를 잉태 했는데도,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집과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었다. 성모님의 “예!”는 나중에 돌아올 이득이나, 훗날의 행복을 위한 “예!”가 아니었다. 죽을 수도 있는 극한 불공명의 상태에서의 “예!”였다.
우리는 지성(知性)을 먼저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 늘 우리 자신에 대해 영적인 사정작업을 해야 한다. 그 사정 과정은 앞에서 성모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사정의 영적인 예비단계인 ‘경외’(Awe)와 ‘주의’(Attention) ‘머묾’(Abiding)의 세 단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 후에 지성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초월에 대한 체험이 있다. 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다. 성체 조배나 묵주의 기도,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하느님을 체험한다.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이러한 초월 체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초월체험들은 아득한 무의식층 아래로 가라앉는다. 소위 뛰어난 영성가들은 이러한 초월 체험을 의식층 위로 다시 끌어올린 이들이다.
이렇게 무의식층 밑으로 가라 앉아있는 초월적 의식을 찾아내서 의도적으로 의식층으로 올려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자주 반복해서 하다보면, 미래의 삶에서 어떤 사건에 직면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영적 사정과정의 세 단계는 자연스럽게 실천에 적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상에서 내리는 모든 지성적 판단도 자연스레 영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영적인 영향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성적 생활을 하게 됐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영성적 생활에 있어서, 스스로에 대한 영적 사정활동으로서의 ‘경외’(하느님 은총에 대한 경탄과 두려움)와‘주의’‘머묾’은 꽃 중의 꽃이자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어하고,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곤란한다. 우선 몸이 움직여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지성이다. 지성적 깨달음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랑하는 능력, 성실하게 살아가는 힘,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나 스스로를 영적으로 시작해서 영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사정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 핵심은 경외, 주의, 머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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