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마지막 휘호(揮毫)다.
“내가 글씨를 참 못쓰는데…. 나 같은 사람이 써서 되겠나….”
“신문사 창간 80주년인데, 더 멋진 말을 쓸 사람한테 부탁을 하면 좋잖을까 싶네만….”
완곡한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기대에 차 바라보는 눈빛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해맑은 그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드리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활짝 문을 열어주던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붓을 잡았다.
2007년 3월 17일 서울 혜화동 주교관 내 집무실, 가톨릭신문 창간 80주년을 앞두고 축하 휘호를 부탁한 자리였다.
김 추기경은 “이제 손이 떨려 어떻게 써야할지…”라고 말하며 먹을 갈고 있는 이의 손과 종이를 번갈아봤다. 그리곤 “무슨 말을 써주면 좋을까?”하고 되물었다. 주변에 함께 있던 이들은 이구동성 “어떤 말씀이든 추기경님의 한마디면 충분합니다”라고 외쳤다.
긴 시간이 필요친 않았다. 잠시 흰 한지를 들여다보나 싶더니 ‘일필휘지’. 먹물을 넉넉히 머금은 붓이 한숨에 움직였다. 곁에 선 이들은 붓끝만 내려다봤다.
붓끝이 한지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탄성이 절로 터졌다.
‘세상의 빛’, 가톨릭신문의 소명을 환기시키고 격려를 전하는 절묘한 한마디였다. 그렇게 ‘툭’ 튀어나오듯 말마디를 건져 올리는 모습에서 가톨릭신문에 대한 사랑을 재차 확인했다.
김 추기경은 주변의 탄성을 뒤로 하고 새 종이를 한 장 더 올렸다. 뭔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공들여 한자 한자 써내려갔다. 낙관을 찍는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한 모습이었다. 처음 쓴 글씨는 따로 보관하면 좋겠다며 비서수녀가 고이 접어 가져갔다.
그때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관절염으로 악수조차 힘겨운 때에 큰 붓을 잡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김 추기경은 생전에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부탁에 응하기 위해 간간이 휘호를 남겼다. 그러나 2007년 이후 기력이 급격히 쇠하면서 더 이상 붓을 잡은 시간은 없었다.
가톨릭신문 창간 80주년 축하휘호 ‘세상의 빛’은 김추기경이 이 땅에 남긴 마지막 글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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