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현양사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김 추기경이 교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는 움직임이다. 사회복지 및 민주화, 사회정의에 기여한 업적도 차제에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세요’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캠페인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같은 모든 현양사업은 추기경의 영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 추기경 영성에 대한 연구와 체계화가 선행될 때, 그 현양 사업도 큰 열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 추기경 영성 현양에 대한 큰 줄기들을 짚어본다.
▨ 박학한 무지의 영성
1400년대 독일의 추기경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박학한 무지’를 말했다. 쿠자누스 추기경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완전한 앎이라고 말했다. 신의 섭리를 속속들이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은 모르는 것이며, 신의 섭리가 너무나 깊어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진정으로 신의 섭리를 안다는 것이다.
600년 후 한국의 추기경이 이 박학한 무지를 살다가 갔다. 김수환 추기경은 신 앞에서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자주 말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참으로 먼 곳에 계십니다.”
김 추기경은 피정 등을 통해 하느님을 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느님과 가까이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쿠자누스 추기경에 의하면 이러한 김 추기경의 신앙이야 말로 진정으로 신의 뜻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신의 경지를 파악할 수 없기에 한없이 감사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나약한 인간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그림자를 닮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시고 십자가상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거기서 결론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신앙대학 강좌, 1980년 3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큼 귀한 존재이기에 어찌 ‘나’를 사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김 추기경의 ‘나’ 사랑은 이기적 자애심과는 다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나 자신이 잘난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이유에 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이 생각한 하느님은 나를 비롯한 세상 모두의 ‘나’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김 추기경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너’를 사랑하시고 ‘그’를 사랑하시고 ‘저’를 사랑하시는 존재다. 여기서 사랑의 당위성이 나온다. 여기서 김 추기경의 신앙 경지가 엿보인다.
▨ 낮은 곳으로의 영성
참으로 닮았다.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지성, 고 윤형중 신부(1903∼1979)는 선종 직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장기기증(눈)을 했다. 윤형중 신부는 삶 자체를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자주했다. 윤 신부는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김 추기경도 그랬다. 사실 추기경이 말한 모든 것은 ‘감사’와 ‘사랑’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텔레비전에 무허가 판자촌에서 화재가 났다는 뉴스가 나오면 그 즉시 빈민사목 담당 사제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라고 독려하던 그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장 찾아가서 미사를 봉헌하자고 말한 것도 그였다. 탄광 노동자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겠다고, 강원도 사북까지 찾아가기도 했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매춘 여성 보호시설을 찾아 상처 입은 영혼들의 여린 손을 잡아주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시어 당신과의 생명의 나눔에 초대하시고 같은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첫째 관심사는 인간이며 또한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것도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988년 11월, 일본 상지 대학 강연)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정신만이 우리 모두를 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진정 보다 인간다운 사회가 되고 이 땅에는 참된 화해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1994년 5월, 연세대학교 강연)
이러한 믿음 때문에 김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김없이 자신의 시간을 내놓았다. 특히 그가 우선적으로 만난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서울대교구장직을 수행하는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이 살고 있는 복지시설 등지를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말 구유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김 추기경의 노력과 영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1979년 4월, 영등포 교도소 미사)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 하셨습니다”(1999년 7월, 서울구치소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
김 추기경은 기회가 닿을 때 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사북 탄광을 찾아 탄광 체험을 했으며, 사형수 및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를 직접 주례했다. 또 매춘 여성들을 위해 큰 관심을 기울이는 등 수많은 복지시설을 찾아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김 추기경은 또 본당에 견진성사 방문을 하게 되면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묻는 등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빈민촌에 예고도 없이 찾아가 철거민들과 대화했다. 서슬 퍼런 유신 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달려가서 호소할 때 기꺼이 만나주었다. 아파하는 사람들의 호소에 함께 아파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온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그 낮은 곳으로의 영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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