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한 점 앉지 않았다.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있었다. 나무묵주 하나 지니고 떠난 주인만 빼고 말이다.
김 추기경 선종 사흘째인 2월 18일, 서울 혜화동 주교관을 찾았다. 김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직 은퇴 이후 10년여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유품 정리가 끝날 때까지 김 추기경의 비서신부·수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김 추기경의 개인 공간을 단독 방문했다.
비서수녀가 미리 싸둔 종이상자 몇 개가 쌓여진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 전체 풍경은 평소 취재 등으로 방문했던 때와 다름없었다. 집무실을 비롯해 침실과 서재를 다 포함해도 스무평 남짓한 이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신자들이 전한 크고 작은 선물이라는 것도 새삼스럽진 않았다.
손때 묻은 성경과 성무일도, 일기장…. 금방이라도 김수환 추기경이 자리에 앉아 집어 올릴 듯하다. 안경과 보청기가 따로 놓여진 것만은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특히 일기장은 김추기경의 소리를 생생히 전하고 있었다.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다. 신문을 보고 떠올린 생각 혹은 미사를 봉헌한 후 느낌, 주교관을 찾은 손님들과 나눈 대화…. 매일의 경험 안에서 길어 올린 기도와 묵상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2007년 12월 이후부턴 일기 횟수가 줄었다. 지난해 9월부턴 펜을 든 흔적이 없다.
“주님, 제가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 되게 하여 주소서. ‘제가 한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언제나 저를 완전히 바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제 혼자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룩될 수 없는 일입니다…” (2007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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