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뒹군다. 세상이 고요하다. 찬바람이 마음을 한바탕 쓸고 지나간다. 마음이 휑하다.
2월 20일, 김수환 추기경 몸 위에 흙이 뿌려지던 그 시간…. 김 추기경이 늘 걷던 혜화동 주교관 뒤편 신학교 산책로의 흙을 밟았다. 6년 전 김 추기경과 우연히 함께 걸었던 길. 이제 김 추기경은 없다. 혼자서 걸었다.
김 추기경이 묵었던 주교관에서 나와 산책로 오르는 길은 약 20° 경사의 오르막길이다. 20여 미터. 근력 약한 노인도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오르막 끝에 다다르면 바로 신학교 진리관 뒤편을 가르는 폭 2m 가량의 편안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생명력 가득한 참나무가 가득하다.
정적(靜寂). 숨쉬기가 편하다. 도심의 복잡한 소음이 없어 귀도 모처럼 한가해 한다. 맑은 공기로 마음과 머리, 몸도 편하다. 오랜 세월 불면으로 힘들어했던 김 추기경도 이 길에서 맑은 공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뿌연 몸을 걷어낼 수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러진다. 봄의 희망도, 여름의 활기도, 가을의 고풍스러움도 이미 사라졌다.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 죽어 떨어진 낙엽에서 서러움이 밀려든다. 김 추기경이 없어서 그 서러움이 더하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김 추기경이 밟던 흙, 김 추기경이 만지던 나무….
김 추기경과 함께 앉았던 벤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두 명이 앉으면 편안한 자리. 옆 자리 조금 남겨 두고 한쪽 켠에 혼자 앉았다.
김 추기경이 말을 건다. “하느님에게 가장 큰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요 아울러 이 인간들이 당신 안에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도, 죄 많은 인간을 다시 구원하기 위해 본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하시어 당신의 얼인 성령을 보내심도 이 때문이고. 교회를 세우심도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참으로 그리스도로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아버지이신 그분 아래 전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데 그 사명이 있습니다.”(1981년 9월 19일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사회 과학 심포지엄)
멀리 신학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웃는다. 김 추기경은 하늘나라로 갔고, 추기경의 길을 뒤따라 걷겠다는 이들이 신학교에 첫 출발을 한다. 신입생들의 웃음을 보고 하늘에서도 웃는다.
“추기경님. 하늘에서 편히 계시죠? 저희들에게 참으로 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 감사합니다.”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논쟁, 주장, 주의, 이념, 다툼, 쟁취…. 김 추기경이 걷던 산책로에는 세상 사람들의 것이 없다. 편안함만 가득하다.
산책로 끄트머리에 ‘목자(牧者)의 길’ 표지석이 보인다. 신학생들은 이 길을 목자의 길이라고 부른다.
목자가 걸었던 목자의 길. 목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는 참으로 복음의 예수님, 가난한 예수님, 겸손한 예수님, 병자나 죄인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가까운 예수님, 이러한 예수님과 닮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사제에게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어둠 속에 절망 속에 빛이 될 수 있고 죽음 속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야 합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예수를 닮은 사제로 백성 앞에 설 수 있습니다.”(1990년 11월 23일 사제총회 강론)
‘목자의 길’에서 이제 김 추기경을 다시 만날 수 없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친 듯 당황스럽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김 추기경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영원히 우리와 동행할 그 말…. 우리가 받은 숙제이기도 하다.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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