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초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있었던 서울 혜화동의 가톨릭 대신학교에서 라틴어 추가 시험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니 평소 가까이 지내던 박신학생이 다른 신학생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나를 학교 운동장 한 구석으로 안내하였다.
박신학생의 설명에 의하면 운동장 구석에 있는 재래식 변소에서 용변을 보다가 밑으로 자신의 시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적어도 내 키 정도 깊이는 됨직한 곳에 시계가 놓여 있었다. 근처에 있는 소신학교 목공소에서 긴 나무에 못을 박고 손전등까지 준비한 우리 세 명은 한 시간 이상의 합동 작업 끝에 손목시계를 낚아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춥기도 하고 몸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고자 소신학교 보일러실에서 더운 물로 대충 씻은 다음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보니 500원 정도의 현금과 버스표 8장이 모였다. 막걸리에 라면을 먹고 나니까 700원을 내야 한단다. 버스표 다섯 장은 모자란 저녁 값으로 내고 한 장씩의 표를 호주머니에 넣은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신설동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나니 버스표도 돈도 없는 사정 이야기를 버스 안내양에게 했더니 그냥 웃기만 했다.
내가 사제가 되고 첫 미사를 박신부님의 신골 본당에서 지냈는데, 그 곳 신자들에게 시계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마음 놓고 웃으셨다. 시중 가격으로 만원쯤 되는 그 시계를 구해내느라고 영하 15도의 강추위와 얼어붙은 변소의 안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일이 왜 그리도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다시금 묵상해 본다.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그 때 우리 세 신학생의 마음은 순수하고 가난했던 것 같다. 비록 향긋하거나 깨끗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어머님의 신학교 입학 선물을 아끼려는 마음과 친구를 도우려는 순수한 우정이 모여서 아름답고 재미있는 추억이 피어난 것이다.
많은 것(재물, 명예, 권력, 쾌락)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순수한ㆍ우정, 진실, 용기, 평화, 지혜, 사랑, 자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심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미 소유한 귀중품들을 아끼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진실과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내어줄 힘은 약해지기 마련인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순수한 우정을 신뢰이며, 우리네 인생의 진짜(원조) 맛과 멋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는가에 달려 있기보다는 주어진 모든 것들을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번 주일은 거룩한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기리고 되새기는 날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진짜로 행복한 분들의 삶은 부자 생활이 아니고 오히려 가난한 데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까? 가난은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 일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네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유에만 집착하는 습관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눈을 멀게 하여 더 좋은 것들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겁하게 만들며 결국은 참된 행복을 저버리게 만든다. 술 중독증, 일 중독증, 도박 중독증 환자들에게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것들도 내적인 자유를 잃고 나면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만다. 우리 모두 참된 내적 자유와 신앙의 지혜안에서 예수님의 참된 행복 선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오히려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삶인가에 마음을 두고 기도해 보세요』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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