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다』고 불쑥 말했다. 갑자기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담배 좀 작작 피우라고 평소에 성화한 일도 없었으므로 아내는 나의 「단연(斷煙)」선언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 역시 미리 결심을 했거나 준비를 했던 터도 아니었다. 다만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떴을 때 입이 너무 썼고 속이 엉망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어제도 또 대취해서 새벽에나 귀가했던 것이다.
술을 왜 마셨는지, 누구와 만나서 술자리 가는 게 불가피했다든지 하는 설명이나 변명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다. 핑계는 언제나 있지만 「언제나」있는 핑계에 믿을 값어치가 있겠는가. 사실 핑계라고 둘러댈 만한 것도 할 말도 따로 없었는데 나온다는 말이 느닷없는 「담배 끊겠다」 였던 것이다. 평소의 「신용도」로 미루어 이 말이 아내를 믿게 하거나 어떤 효과라도 냈음 직하지는 않다. 나 역시도 내 말이 지켜지리라 믿지 않았다.
언론사에 들어온 지 20년쯤, 나는 그 때 편집국의 한 부서를 맡은 부장이었고 소년 시절부터 배운 술 담배에 절어서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은 「집 나가 재산 탕진하고 허랑 방탕 놀아나는 아들」 그대로의 모습이면서 성서 비유에서와는 달리 발길 돌릴 줄은 몰랐다.
『오늘부터 담배를 끊었다』 고, 나는 그날 회사 동료들에게도 선언했다. 집에서 불쑥 내뱉은 허튼 약속을 공공연한 사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내가 혹시 담배에 손을 대거든 욕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부원들은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금단(禁斷)현상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특히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집중할 수 없어 난감했지만 나는 철들고 처음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발길을 돌리는」 이 거사(擧事)를 성취시키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그 때로부터 20년이 더 지났다. 나의 금연기(禁煙記)를 듣는 이들은 「독(毒)한 사람」이라고 욕 아닌 욕을 한다. 단 한번 결심으로 끊은 것이 「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금연이 그런 말을 들을 만큼 그토록 대단한 일이었다고 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무렵 나에게 거의 동시에 잇달았던 어떤 「이끄심」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하는 편이다.
내가 맡은 지면에 순교의 역사를 현장 중심으로 읽기 쉽게 엮은 「한국의 성지」를 연재하면서 그 취재를 담당한 기자가 세례를 받은 「사건」은 연재 뒤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어 고맙다는 이유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감사패 받은 일과 함께 나의 언론 경력에서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다. 또한 신년 특집 연재 기획으로 갑자기 이스라엘 출장을 명 받고 「예수 발자취 따라」 혼자 헤맨 여정, 그리하여 종합 일간지에 「하늘의 길 땅의 길」을 제목으로 대형 성지 르포를 컬러로 연재한 것은 기자로서의 「일」이든 신앙인으로서의 「순례기」였든 대단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담배를 끊었던 그 사순 때 뿐 아니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아들」로 언제나 반겨지는 나의 꼴을 보곤 한다. 사순절이면 더욱 손잡아 이끄시는, 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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