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자로 편에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란 말이 나온다. 부화뇌동이란 사전적인 풀이로 우뢰가 울리면 만물이 이에 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서 경솔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하는 행동인데, 『화합할 수 있느냐?』 하는 점과 더불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화합과 부화뇌동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미묘한 문제이긴 하지만 성질이 급한 한국인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게 된다. 이날 전례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기념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과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게 된다.
예루살렘 입성 사건,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사건의 의미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4가지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첫째의미는 예수께서는 즈가리야 9, 9. 창세기 49, 11에 예언된 바와 같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겸손한 임금님으로서 그들의 희망을 채워줄 왕 메시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로 기원전 841년 예후가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할 때 사람들이 자기네 겉옷을 깔았듯이 이제 임금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같은 사랑과 존경을 보이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예수는 시편 118, 26에 예고된 대로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라는 점, 넷째는 예수는 다윗의 나라, 즉 메시아 왕정을 세우러 오시는 임금임을 드러내는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다.
그리고 수난기. 재판 중에 빌라도와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유다인의 왕이라는 문제이다. 결국 이 두 분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해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되고, 이 수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때 되풀이해서 읽게 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이 부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는 예수님은 분명 유다인의 왕,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왕임이 분명하지만 그분이 앉으실 왕좌는 화려한 옥좌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이요, 우리가 섬길 메시아 왕은 십자가의 예수님이고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왕임을 보여 주고자 하는 의미가 아닐까 여겨진다. 어떻든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님이 왕이심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음도 역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이 두가지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군중들의 양극단의 모습이다. 예루살렘 입성 때는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기쁨을 감추지 못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을 외치던 군중들이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는 그들의 모습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이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 모습은 몇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군중심리의 거짓성과 부화뇌동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 군중들만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고 흥분을 잘한다고 한다.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언론과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흥분하여 『이래서는 안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고 한바탕 호들갑을 떨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잊어버리고, 똑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군중심리의 한 단면일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모습의 한 원인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관이나 자기 중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의 모습 때문이라는데 많은 이들이 찬성하고 있다.
한일 합방 때 앞장서 한일 합방만이 우리들의 살길이라고 선전하고 앞장섰던 그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독립된 나라의 지도자로 자리바꿈하고 똑같은 그들이 박정희 시대에는 유신 헌법만이 살길이라고, 그리고 전두환 시대나 그 이후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변신과 타협만이 출세와 현실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한 사회이기에 일생을 살면서 지켜야할 가치관이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원칙이란 교과서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일상의 삶에서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변화와 타협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과 정신 문화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이 「자기중심을 지키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의 가치실현을 한 이들이라는 점」은 성주간을 맞으면서 한번 묵상해 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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