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무엇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십인십색이요 백인백색일 정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필자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신학교 때 어느 교수님의 이야기다.
그 분은 사랑을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사람이 장미꽃이라면 장미꽃이 되게 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할미꽃이라면 할미꽃이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그 사람 안에 숨겨진 의미, 그 사람 안에서 꽃피우기를 희망하는 그 무엇을 꽃피게 하기 위해 물을 주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사랑이란 것은 「타인이 가지는 단점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고 정의한다. 장미의 꽃 뿐만이 아니라 장미의 가시까지 받아들이는 용기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비록 삶에서는 실천하지 못하지만 사랑을 이야기 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란 말과 『장미의 가시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는 이 말씀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고, 결혼 주례사로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새로운 계명이라고 선포한 사랑의 계명은 물론 새로운 계명은 아니다. 예수님 전후 시대만 보더라도 유다인 사상가 필로도 하느님 공경과 이웃 사랑을 기본 계명으로 보았고, 율사 아키바는 이웃 사랑을 율법의 통일 원리로 보기도 할 정도로 사랑의 계명은 보편적인 계명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새롭단 말인가 ? 아마도 요한 복음사가가 이 계명이 「새롭다」라고 표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계명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러나왔다는 점으로 이 계명 안에 포함된 「서로」라는 말마디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흔히 요한계 문헌 안에 나타나는 가장 감동적인 말이 사랑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요한 문헌 안에 나타난 사랑이라는 말을 비판한다. 너무 배타적이고 편애적인 사랑이라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간의 사랑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물론 의의있는 말이고, 이론적으로는 분명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교하기는 초라한 사랑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의 삶 안에서 정말 가능할 것인가? 극단적인 예일 수 있지만 나의 아내와 다른 여자를 똑같은 크기로 사랑한다면?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 삶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어쩌면 나의 아내를 10만큼 사랑한다면 다른 여인을 5만큼, 내 공동체의 사람을 10만큼 사랑한다면 타 공동체의 사람을 8이나 5만큼 「덜 사랑」할 때만 의의를 가지는 원초적으로 편애적이고 배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말일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새 계명을 선포하는 자리는 모든 유다인이 모인 자리는 아니다. 고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자리,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배반자 유다가 떠난 그 자리, 소수의 제자들만이 모인 그 자리였다는 점과 「모든 이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라고 공동체 내의 우선적인 사랑을 이야기 한 점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하지 않을까 !
둘째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이 새로운 점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말은 가까이는 세족례를 뜻할 것이다. 발을 씻는 것. 종이나 하는 일을 주인이신 그분께서 하셨다. 서로 봉사하라고.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이 독특한 점이 있다면 우리의 죄 때문에 목숨 바친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죄가 크고 엄청나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 죄를 고발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 이유는 연약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속죄하기 위한 행위였다. 예수님의 사랑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인간의 죄라는 가장 부끄러운 부분마저도 받아들이고 감싸안은 사랑. 장미의 꽃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라는 장미의 가시까지도 포용하는 사랑이요, 가라지의 비유에 나오듯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가라지를 받아들이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리라!(마태 13장 24 )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고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말은 「사랑은 실습을 통해서만 진보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말일 것이다. 사랑이 연구와 이성을 통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실습과 연습을 통해 진보되는 살아 있는 기술이라는 이 말! 정말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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