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강원도 홍천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집에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장롱 속에서 오래된 아버지의 홀로 사진과 면바지를 보았다. 사진은 30대 초반의 미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양복과 구두를 신고 자신감 있게 활짝 웃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의 면바지는 일정말기에 최고의 멋쟁이들이 입었던 옷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시고 급기야는 3년 동안이나 누워서 지내셨다. 나는 병들어 초라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좥그 옛날의 멋쟁이의 모습은 어디 갔으며, 아버지의 참 모습을 무엇일까?좦 하고 상념에 빠졌다. 더욱이 임종하신 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하는 장면에서 사제인 나로서도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약 3년간이나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의 여러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의 기적들을 행하셨고, 성전에서는 잡상인들을 내치셨으며, 죄인들과 음식과 술을 드셨고, 창녀가 당신의 발을 눈물로 씻도록 하셨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재판을 받으셨고, 온갖 모욕과 매를 맞으신 후에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고난 한 가운데에서 뛰어드셔서 인간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드러내셨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통하여 가장 하느님다움이 무엇인지도 보여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도 자기중심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인간의 속모습보다는 겉모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남녀의 성차별, 나이의 차이, 피부색, 직업, 지위의 높낮이, 성직자 평신도의 구분, 외모 등등에 따라서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80년대 초에 한국에 오셔서 서강대학교를 잠시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나도 수녀님이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하기도 하여 운동장에 달려갔었다. 수녀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얼굴에 주름이 많으시고, 체격은 아주 왜소하신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학생들에게 에워싸인 채 담담한 미소로 겸손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시던 데레사 수녀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통하여 나는 분명히 어떤 빛과 인간의 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참 모습을 보았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셨다" (마태오 17장 2절). 이것은 제자들이 이제까지 보아왔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당신의 수난이 가까운 시점에서 당신의 진면목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까? 여러 가지의 뜻이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잘못된 습관들에서 벗어나는 때이다. 특별히 사람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고 겉모습에만 집착하여 판단하는 우리네의 악습에서 벗어나 거듭나야하는 때이다. 그것은 인간의 참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나는 사순절 동안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분의 모습을 새롭게 정립하련다. 젊은 시절의 멋쟁이 모습이나, 병드셨을 때의 모습이나, 시신이 되어 관속에 놓인 모습이나, 단지 그분의 겉모습일 뿐, 아버지의 참 모습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거듭나는 만큼 새롭게 비추어질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통하여 하느님의 빛을 보여주십시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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