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예수회라는 남자 수도회 소속의 신부인데, 아직도 약 6개월간의 수련을 더 받아야 정회원이 될 수 있다. 이 수련을 제3수련이라고 부르는데, 예수회는 제3수련을 책임지는 수련장을 특별히 영성과 인격에 있어서 탁월한 분을 임명한다.
현재 미국 예수회에서 유명한 제3수련장인 래리 길릭 신부님은 소경이다. 원래는 예수회의 평수사로 있다가 교황님의 윤허로 사제가 되셨고, 지금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 길릭 신부님께 피정 지도를 받은 많은 신부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내용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길릭 신부님은 수련자의 이야기를 아주 세심하고 정성스레 들으신다. 단지 수련자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그 목소리를 통한 마음과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둘째로 수련자가 한 말들을 아주 잘 기억하신다. 심지어는 수련자마저 잊어버린 말까지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은 피정자가 자기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보다 지도자가 더 관심을 기울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셋째로 피정자에 대하여 선입견을 갖지도 않을 뿐더러, 속단을 내리지도 않으며, 가능하면 피정자 자신이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스스로가 깨닫도록 배려하고 기다리신다. 그러면 길릭 신부님이 처음부터 이토록 탁월한 영적 지도자였을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영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시간과 여러 가지의 노력과 깨우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남의 목소리만을 통하여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참지 못하고 중단시키려한다. 대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겉모습과 표정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선입견 범위 안에서 말을 듣고 해석한다. 그러나 소경이면서도 수십 년간의 영적 수련을 통하여 기다림과 인내를 체득하신 길릭 신부님은 비록 수련자의 표정과 외모는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둘째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려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관심이 필요하다. 세상의 온갖 못된 사람들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사람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를 범해도 금방 단죄하거나 불신하기 쉽다. 결국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영적인 눈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수련자가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웃을 자신의 편견과 이기적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소경인 길릭 신부님은 신앙(영혼)의 눈으로 피정자 안에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부단히 기도하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요한 9, 6). 그런데 편견과 불신에 사로잡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소경을 집요하게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세 단계에 걸쳐서 자신의 눈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다. 첫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자기의 눈을 뜨게 도와준 좋은 분이라고 말한다(11절). '육안(肉眼)의 열림' 둘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답변한다(17절). '심안(心眼)의 열림' 셋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고백한다. '영안(靈眼)의 열림' "주님, 믿습니다(38절)".
많은 사람들이 육안(肉眼)에만 집착한 나머지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은 흐리거나 먼 상태이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듯이 우리 자신의 눈이 잘 보인다고(41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나는 마음과 영혼의 장님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먼저 마음과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그리하려면 육체의 눈을 맹신하는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나라로 들어가십시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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