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등산가에게 산에는 왜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인즉, "산이 거기 있으니까""였다. 참으로 명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산이 부르니까"라고 대답하겠다.
성서는 왜 읽으며 왜 공부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성서가 있으니까, 성서가 우리를 부르니까''하고 대답한다면 어떨까.
성서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베스트셀러요, 성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설명을 하였다. 많은 학자와 교사들이 신명을 바쳐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가 성서를 충분히 다 알아들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마치 구비 구비 산맥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산이나 끝없이 넓고 큰 바다와 같이 성서에 담긴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의 그 깊이와 높이를 재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자비하신 하느님의 가슴이 바다처럼 넓고 그 심오한 지혜는 웅장한 산과 같음을 거듭 거듭 감탄하게 해줄 뿐….
하여 성서에 대해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또 한 번 신문지상을 통하여 쓰게 되는 이 글도 필자가 성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기쁨을 얻은 경탄의 글 이상이 아닐 것이며 그 경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의 지면이 되기를 바라면서 아울러 '말씀'께서 말씀하시도록 그분께 최대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나의 세 오라버님 중의 한 분이 작년 9월에 모처럼 성서공부를 시작했다고 해서 아주 기뻤는데 지난달에 궁금하여 전화를 드렸더니 성서 공부 이제 안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성서를 읽다보니까 불경스러운 이야기기 많더라는 것이다. 거룩한 책인줄만 알고서 늦었지만 공부를 좀 해볼까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별 재미도 없고 실망하여 책을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공부가 필요한 것이지요. 왜 그런 이야기를 성서에 담아놓았겠어요. 다 이유가 있다고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성서교재도 어려워서 흥미 없어하는 연세드신 분을 우격다짐으로 공부하시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제가 그럼 아주 쉽게 오빠한테 이야기 하듯이 글을 써볼테니까 가톨릭신문에서 제 글을 읽으시면서 동생한테 코치 좀 해주세요''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래서 앞으로 쓰게 되는 이 글은 성서에 관한 한 초보자인 나의 오빠에게 코치를 받아가며 쓰게 될 것이다. 성서는 이름 그대로 거룩한 책이다. 불경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더라도 변함없이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인 것이다.
모든 책에는 저자가 있다. 유명한 대하소설인 ''토지''의 저자는 박경리씨이며 ''태백산맥'의 저자는 조정래씨이다.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통독을 했을 경우에 토지나 태백산맥과 같은 작품성과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렇다면 굳이 성서에 대해서 두고 두고 설명을 한다거나 해석을 거듭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약~신약, 1300년 걸쳐 완성
성서는 그렇게 일반 문학 작품처럼 한 저자에 의해서 저자 당대에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 크게 다르다. 성서가 쓰여진 현장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이다. 시대로 보면 기원전 13세기에 활약한 모세에게서 비롯하여 마지막 복음서가 쓰여진 기원후 1세기에 끝났으니 무려 1300년의 간격이 있다. 그 장구한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개입한 한 민족의 역사를 어느 이름모를 신학자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언자들이 자기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최초의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하느님 사랑」이 일관된 주제
그러면 성서의 저자는 누구인가. 성서의 원저자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직접 쓰신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저술가나 예언자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해야한다. 여러권의 성서마다 문체가 다르고 고유한 표현방식이 있는 것은 성서 각권이 쓰여진 시대와 저술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저술가가 있지만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일관된 주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의 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의 원저자를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성서가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 안에 하느님의 영감이 작용하는 것을 기록한다면 그리고 그 영감에 따라 살아간다면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성서요, 삶의 복음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서의 원저자인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노리고서 최초의 성서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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