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서 희년의 규정을 지켜야 할 주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땅 역시 안식(shabbat)을 지켜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그 땅도 주님의 안식을 지켜야 한다(레위 25,2).
땅이 지켜야 할 안식 혹은 휴식으로 표현된 은유는 성서적이고 영성적인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땅의 은유가 내포하고 있는 바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간추려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땅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 땅도 안식을 지킴으로써 인간의 소유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의 기능적인 역할만을 생각하며 이를 소유물로 예속시켜서는 안된다. 땅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소출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케하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둘째, 땅이 안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땅의 주인과 창조주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며, 하느님만이 땅에 대한 절대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요 거류민일 따름이다 (레위 25,23). 인간은 유일하고 합법적인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이며 거류민이다.
셋째, 땅의 은유는 거저 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하느님께 속하는 땅에 산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조건없는 사랑으로 거저 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땅이 열매를 내주어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그곳에서 평안히 살게 되리라. 씨를 뿌려서도 안되고 소출을 거두어서도 안 된다면, 우리가 일곱째 해에는 무엇을 먹으리요하고 너희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섯째 해에 나의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나게 하겠다(레위 25,19~21).
넷째, 땅의 안식은 정의에 입각한 것이다. 만일 땅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땅은 모두의 것이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땅이 지닌 이같은 보편적인 목적을 부정하거나 억제하는 인간적인 모든 원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죄이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자신의 행위와 존재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정의이며, 이는 평화를 꽃피게 한다(이사 32,15~20 참조).
다섯째, 땅의 안식을 통해 불평등과 불의를 종식하게 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면서 정의를 실천할 것을 명하셨다. 그러기에 인간은 땅의 소출과 연관된 모든 형태의 착취,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한 착취를 땅에서 자행해서는 안된다. 땅과 연관지어 구약성서 희년에서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빚을 탕감해 주며, 노예들을 해방할 것 (레위기 25장 외에 예레 34, 8이하와 이사 61,1~3도 참조)을 명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명령을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의 평등성과 존엄성이 재설정되고 불균형은 사라지며, 모든 이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 땅의 안식은 용서와 연관된다. 구약성서의 희년은 화해의 축제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소리를 크게 울려라(레위 25,9). 희년은 사회적 불균형 뿐만 아니라 죄 자체를 분쇄시키는 것이므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모든 고통과 폭력이 사라지는 메시아 시대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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