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에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때 누군가 말했다. 성수대교를 복구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서 후대의 교훈으로,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랬다면 한 백년쯤 지난 뒤에 후세들이 그 끊어진 다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온갖 상상을 유발케 하는 전설의 다리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 보게 되는 바벨탑 이야기도 이웃 강대국인 바빌론에 커다란 탑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굉장히 크고 높은 탑이 미완성된 채로 폐허가 돼 있는 것을 보고서 야휘스트인 이야기꾼 성서저자는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것이다.
성서 저자는 지금까지 세상 죄악의 원인들을 탐구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서로 다른 민족끼리 언어가 달라서 통할 수 없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부정적 현상으로 보고 그 원인을 바벨탑 이야기로 설명하려 한다. 온 세상이 한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민족이 본래 한줄기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동쪽에서 왔다는 말은 에덴의 동쪽에 자리잡고 살았던 조상들을 기억하는 말이고 시날이라는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다.
아마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고 안정된 곳을 찾아 시날에 도착한 이들은 아예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다른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한다. 시날에 도착한 이들은 벽돌을 구워내어 탑을 쌓고 도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의 벽돌 건축물들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존될 정도로 튼튼한 것이었다. 잘 발달된 벽돌기술 문명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을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느님이 이 탑 쌓는 일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하늘은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키며 「우리 이름을 날리자」는 표현은 인간의 근본적인 명예욕 내지는 야망을 말한다.
우리의 이름 그것은 곧 우리의 존재를 말함이다. 각자 자기 자신의 이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하느님 안의 이름이고 존재이지 하느님 밖에서는 하느님의 영역을 마구 침범해 가면서 명성을 날리려고 하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인간의 도전을 용납하시지 않는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배신하는 자유를 행사한 첫번 선택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탑을 하늘에 닿게 높이 쌓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자』고 했더라면 그 멋진 탑은 대대로 기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도 물론 남아있었을 터인데…. 우리 이름을 날리고 싶으면 하느님 이름을 날려드려야 한다. 정녕 드높일, 거룩한 이름은 그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는 비천한 여종을 돌보신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권능을 떨치는 분이 큰 일을 하셨도다. 그분의 이름 거룩하여라』(루가 1, 49).
베드로 사도는 성전 문 곁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해주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사도 3, 6) 하느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일이 성사될리가 없다. 하느님께서 팔을 걷어 붙이시고 땅에 내려오시어 훼방을 놓으시니 사람들이 서로 말을 못알아듣게 되었다. 더 이상 탑을 쌓지 못하고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창세기 저자는 세우다 만 탑이 있던 도시를 바벨이라고 불렀다.
바벨이란 말은 「뒤섞는다, 혼란시키다」라는 뜻이다. 또 바벨은 바빌론과도 연관이 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바빌론은 항상 원수같은 존재이다. 강대국인데다 문명은 발달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항상 열등감을 갖게 했던 바빌론을 성서 저자가 좋게 그려낼리가 없다.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바빌론은 부도덕과 우상숭배의 대명사로 등장한다(묵시 18, 2 참조).
아담과 카인의 범죄가 개인적인 범죄라 한다면 바벨탑 사건은 하나의 집단적 차원에서 공동체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단절되어 간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창세기 11장까지의 죄의 역사를 보았다. 집안과 부족 가운데서 자행되는 살인과 전쟁, 무서운 피의 복수,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분열된 민족들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죄스런 현실임을 알았고 하느님을 거부한 최초의 악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많아지고 심해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 죄를 처벌하시되 결코 인류의 멸망을 원치 않으시고 어디까지나 인간과의 친분을 회복하시고 유지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보았다. 바벨탑이 미완성인채로 끝난 것처럼 하느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도 그렇게 당신의 마음에 드시지 않는 일을 미리 막아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본다. 자기 욕심만 채우는데 여념이 없는 공복(公僕)들을 흩어버리신다면 수많은 인재를 막을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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