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전 50장 중에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12장부터 25장까지 모두 14장이나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선조 중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과연 위대한 신앙의 선조였다. 아브라함에게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게 한 아브라함의 관대함, 사라가 아이를 못낳자 몸종인 하갈로 하여금 임신하게 하여 이스마엘을 얻은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 그 도시를 구하고자 하느님께 애걸하는 아브라함, 하느님께서 세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과 함께 식사하신 후 아들을 점지하셨고 이듬해 봄에 이사악을 얻음….
이야기 거리가 많지만 그중에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의 시련을 보고자 한다.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하늘을 쳐다 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15, 5) 하고 언약하셨던 그 후손, 큰 민족을 퍼뜨릴 자손을 드디어 얻게 되었다.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만든 성서 영화 「아브라함」에서는 그 사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고대하던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얻자 아브라함은 기뻐 어쩔줄 몰라하며 이사악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이스마엘을 낳아준 하갈도 이스마엘과 함께 멀리 보내도록 허락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은 부족장으로서 부족들안에 적잖이 생기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 주어야 했는데 그런 일도 자연 소홀히 하게 되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답지 않은 그를 불러 다시금 시험을 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 무엇도 하느님 말씀 보다 우선 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백성 돌보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아, 사랑하는 네 외아들(네가 마음을 다 뺏겨버린)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22, 2) 사람이든 사물이든 내 마음을 다 뺏는 대상이 있다면 나는 이미 평정을 잃게 되고 따라서 올바름도 진정한 사랑의 기준도 모호해져 버린다. 「아브라함」 영화를 만든 이는 바로 그 관점에서 이사악을 바쳐야 하는 당위성을 찾으려 한 것 같다.
어쨌든 성서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의 심정을 장황하게 묘사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점이 더욱 웅변적인 감동을 일으킨다. 이사악을 바치라는 분부를 받잡고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러주신 산으로 길을 떠났다. 아마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였을 것이고 수많은 의문과 마음의 폭풍이 어찌 일지 않았겠는가.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그 아들이 아닌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이란 말까지 덧붙이는 하느님이 어찌 얄밉고 야속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의 회오리를 하느님 말씀 앞에 잠재우는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다듬어진 인격이 놀라울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아브라함을 위대한 신앙의 선조라고 일컫는 것이다. 자녀를 신학교나 수도원에 보내는 부모는 아브라함이 겪은 아픔을 더욱 공감할 수 있으리라. 혹시나 외아들이나 장남 또는 외동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수품식장에서, 서원식장에서 그 부모님께는 더욱 큰 박수를 보내드리는 것이다.
어떤 자식이든 부모에게는 보물이요, 동시에 애물이 아닐런지. 자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는 보물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보물이기 때문에 애지중지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마음을 다 뺏겨버릴 수 밖에 없게 되니 기쁨의 원천은 동시에 슬픔과 괴로움의 원천도 돼버린다.
우리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기만의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을때 비로소 참된 신앙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미 태고적에 그 멋있는 신앙을 한 칼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까마득하기만한 신앙인의 조상으로서 우러르고 존경과 감사의 정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야훼께서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 내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속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막역한 친구였다.
「믿는 사람의 조상」 「하느님의 친구」 이보다 더 영예로운 칭호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교인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과 마호멧 교도들까지 아브라함을 극진히 숭배하고 있다. 하느님이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때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12, 2) 하신대로 과연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하느님의 친구 아브라함 할아버지. 다정히 당신의 이름을 부를때 당신이 누리신 하느님과의 우정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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