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공포와 불안은 죽음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두려운 것은 의지나 행위의 주체인 인간이 스스로 삶의 지고한 목표를 잃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 즉, 미래의 희망을 잃은 정신적 상태를 「절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절망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병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록 현재 상황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고 창조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위대성과 지고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한다.
이 둘의 차이는 미래를 향한 희망 이것을 간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앙 안에서도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켜야 될 기본적인 덕을 3가지 즉,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 하는데 희망을 그 중의 하나의 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믿음 안에서 가지는 희망의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합리적이고 명확한 근거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사순 제 2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영광 스러운 변모 사건을 보게 된다. 이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나오는 소재들은 하느님이 옛날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오는 소재와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다.
「산」과 「구름에서의 소리」「동반자 3명」등이 그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리고 「모습이 변하다」「옷이 빛나다」등은 묵시문학의 종말 서술에서 빌어 온 소재로 이는 예수님께서 종말을 앞당겨 사신 종말론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는 바로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 즉,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탈출시킨 주인공으로 율법을 선포하고 유다교를 창시한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엘리야는 아합왕 시절 유다교와 율법이 바알 신앙 앞에서 위기상황에 놓여 있을 때 홀로 율법을 수호한 대표적 예언자이다.
그런데 이 분들은 공통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예수 시대 사람들이 그들은 모두 승천하였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승천은 명백히 성서에 나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모세는 모세 오경에 땅에 묻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민간 전승에서는 모세 승천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모두 모세를 승천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승천. 하늘에 올랐다. 이것의 의미는 하늘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하는 것을 알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늘은 단순히 공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장소를 상징한다. 때문에 「승천하셨다」라는 사실은 단순히 공중으로 올라간 사실을 이야기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에 오름,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때문에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천상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장차 하느님 안에서 구원받을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하나의 시현 사화로써 예수님의 초월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구원 받을 사람들이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었을까?
단언 할 수 없지만 미래를 향한 하나의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즉 박해와 고난 앞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간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이 변모 사건 앞뒤에 수난 예고가 나오는 점만 보더라도 수난과 이 사건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두운 밤 폭풍우 속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등대가 바로 이 변모 사건의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박해와 위기 상황 속에서 포기하고픈 유혹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힘도 그들이 누릴 미래의 영광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위기의 순간이 있다. 길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거기에 더하여 나를 위로해줄 단 한 명의 동료도 보이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죽음이 차라리 행복일 수 있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를 다시 구원할 수 있는 힘은 그 고통 속에 잉태된 미래의 결과를 볼 수 있는 눈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의 실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누릴 마지막 영광의 모습을 묵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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