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그레고리오) 시인의 10주기를 맞은 지난 3월 7일, 시인이 묻혀 있는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에서는 그를 기리는 20여명의 지인들이 고인의 묘소에 청주를 붓고, 새로 나온 전집을 묘 언저리에 묻고 있었다. 90년대 문학의 한 상징으로 90년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 특히 대학생이라면 한번은 읽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기형도 시인의 유고집 '입 속의 검은 잎'은 70년대 김수영, 80년대 황지우.이성복의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80년대에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의 전집이 90년대에 출간되는 현상으로 나타날 만큼 기형도 시인의 문학적 생명력은 이미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아버지 기우민(요셉)씨와 어머니 장옥순(마리아)씨의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삶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은 민중시, 노동시 등 투쟁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던 80년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시세계를 다졌다.
기형도 시인의 상징효과가 새로운 삼천년기를 앞두고 있는 90년대 말까지 이어지고 있는 까닭은 그의 시 자체가 지극히 90년대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기형도의 시가 90년대의 문을 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연 90년대 시란 무엇인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이름붙여진 기형도 시인의 미학은 절망의 시어로 90년대 정서를 한발 앞서 담아내고 있다는데 있다.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다.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희망에 속은 90년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솔직한 '절망'이라는 시어는 가벼움의 시대, 대중 문화의 시대 속에 오히려 질식하는 자아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시인이 내면의 고통과 대결하며 입은 상처가 90년대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상처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 나는 부재할 것이다 /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를 두고 / 그래,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 그 후에 /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겨울.눈.나무.숲 中〉"며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이는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엄마 걱정 中〉"처럼 어린 시절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준 부모와 가족의 종교적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사랑한 이들의 식지 않은 사랑이 그가 남긴 시 소설 산문 자료 등을 묶어 '기형도 전집'을 세상에 선보였다. 고뇌와 절망 속에 사랑하는 법을, 사랑 자체를 남기고 간 기형도. 그래서 '기형도'는 죽었으나 '시인 기형도'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 356쪽 /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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