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자기 완성, 자기 실현, 혹은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종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구원이나 해탈이란 용어를 사용하다. 이런 말들의 의미를 단적으로 이것이다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삶에는 뭔가는 모르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채워 가는 과정이 인생이고, 이 부족한 부분이 채워 진 상태를 사람들은 자기 완성 혹은 자기 실현이라는 의미로 알아듣는다.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실현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 방법이나 지향점은 다르지만 부단히 이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족한 부분이 「돈」또는 「권력」등으로 채워 질 때, 우리 인생은 완성된다고 생각하기에 돈과 권력을 위해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 하시기 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을 읽게 된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전 생애의 사상을 서술하는 대목으로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는 구절이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어떤 중요한 일을 준비하는 기간」이기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고 유혹을 이기셨다는 것은 공생활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유혹사화를 읽으면서 이들은 세상을 향한 교회는 항상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우리가 해야할 오늘의 40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광야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광야는 성서에서 고통과 시련의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의 장소로 나타나기에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광야로 나아가신 모습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야 할 오늘날 우리 삶의 광야를 찾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묵상해야 할 주제는 아마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3가지 유혹의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아직까지도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돈과 권력 그 자체를 거부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결코 빵과 권력, 그 자체를 멀리 해야만 할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분명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빵을 준비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 치시는데 거부하신 내용은 빵과 권력 그 자체보다는 그 전제 조건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유혹에도 나타나지만 예수님은 『돌더러 빵이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수고하지 않는 빵, 노동의 결실로써 얻어지는 수고의 빵이 아닌 것에 대한 거부이리라.
즉, 돌이 빵이 될 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허황된 욕심에 대한 거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악마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
사실 예수님이 꿈꾸었던 하늘나라는 하느님 아버지를 유일한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통한 세상의 통치에 강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구절은 권력 자체의 포기보다는 전제 조건인 「악마에게 엎드려 절을 하는 행위」에 대한 거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한 방법과 불의한 수단 등 악마적 방법을 통한 권력욕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요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요구」. 이 유혹은 우주적 자연적 질서를 넘어서는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기술에 대한 욕심이리라. 그러기에 이 거부를 과학이든 학문이든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를 존중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너무 추상적인 이해일까.
어찌하든 오늘 복음을 보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자기완성을 위해 빵과 권력 그리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과 우주적인 질서가 파괴 되고 나의 수고와 노력이 없는 빵과 권력 기술은 결코 인간완성 즉, 구원의 한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성서를 읽기 위해 초를 훔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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