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20일 이후, 광주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몽둥이뿐만 아니라 칼까지 사용하며 시민들을 찔렀다』는 등 계엄군들의 잔혹행위 목격담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고 시민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주교님께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문도 제기됐다. 너무나 졸지에 일어난 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무기력할 뿐이었다. 21일엔 밤을 새워가며 총성이 요란했다.
5월 27일 아침, 헬기 소리에 눈을 떴다. 새로운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라디오를 켜니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했다』는 발표가 흘러 나왔다. 시내전화마저 모두 불통이었다. 8시 45분경 교구청에 전화가 되었다. 관리국장 박상수 신부가 『가톨릭센터 옥상에 군인들이 올라와 있다』고 했다. 이미 도청이 점령되었고 평온(?)이 회복된 듯 보였다. 들려오는 얘기가 많은 시체들이 도청안에 있었다고 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군인들의 잔혹한 진압행위로 인해 시작된 이 사태가 엄청난 희생을 내고 말았구나. 아무리 군인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훈련시켰길래 같은 동포에게 이렇듯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군인들에게 누가 이렇게 참혹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을까. 데모진압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중에 적군에게도 해서는 안될 살상행위를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광주민주항쟁 동안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혼신을 다해 사태 수습을 위해 땀을 흘렸다. 그러나 군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00여명을 잡아가 이들을 내란을 선동한 폭도로 몰았다. 믿고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신부들이 나서야 했다. 그들만이 증거자가 되어야 했다.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진실규명을 촉구하고, 이를 위한 자료와 유인물을 제작했다. 이 와중에 조철현 신부, 김성용 신부 등 8명의 신부가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것도 내란선동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광주사태와 관련돼 구속된 많은 이들 가운데 4명이 이듬해 3월 31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구속자 가족들은 곧바로 명동성당으로 가 추기경 집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나는 다음날 전두환씨를 만나 『광주사태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손상되었는데 또 다시 사람의 생명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모두 사면해주었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답은 비관적이었다. 천근같은 마음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달래며 희망을 잃지 말자고 격려해주었다. 당시 군종사제였던 정명조 신부(현 부산교구장)를 통해 감형 조짐을 전해들었지만 확실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가족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4월 3일 오전 청와대 비서실에서 사면발표에 대한 공식 전갈을 받았다. 나는 지난 며칠간 긴장속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해와 격려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또 서울대교구청 식구들의 따뜻한 접대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날 정오 라디오방송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4명 전원을 무기로 감형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81년 5월, 우리 교구 사제들은 어떤 형태로든 광주사태에 대한 강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그해 5월 10일(성소주일이었다),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였던 경갑룡 주교(현 대전교구장)의 이해와 협조로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그날 낮 12시 미사에서 나는 이전까지 진상규명과 수습차원에서 하던 강론의 틀을 넘어 처음으로 군인들의 살상행위에 대해 발언했다. 그것도 광주 내부에서가 아니라 전국민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광주사태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이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수특전단이 너무나도 잔악한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이에 격노한 시민들이 궐기하고 무기까지 탈취해 항거하게 된 것입니다…(중략)…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상당수의 시민들이 칼에 찔리거나 뭉둥이로 얻어맞아 죽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군인들의 만행에 희생된 사람들입니다…(중략)…사태의 책임을 오로지 시민들에게만, 그리고 그것도 야만적인 방법으로 왜곡된 조사를 진행시켜서 거짓 죄목을 씌워 중형을 가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민족적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으로써 국민의 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국민의 양심적 판단을 억압으로써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진리와 정의에의 열망은 인간의 양심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열망을 거짓과 선동으로 억누르거나 물리적 폭력으로 짓밟는 것은 바로 인간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나는 미사를 허락해준 경갑룡 주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강론을 맺었다. 미사를 끝내고 나왔을 때 신부들은 『조심하셔야 되겠습니다』『대주교님 무사하시겠습니까』등의 농담반 진담반의 걱정들을 했다. 그러나 이날 미사에 대해 교구 사제들은 매우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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