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학과 2학년이던 45년 해방이 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이북은 공산정권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다. 공산정부는 처음부터 드러나게 교회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49년에 들면서 공산정부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해 5월 어느 날 월요일 새벽, 덕원수도원 대원장이며 원산교구장이던 신사무엘 주교가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갔다. 다른 독일인 교수 신부 3명도 함께 연행됐다. 주께서 부르시니, 순교자들처럼 형장으로 가야 한다. 천국에서 만나자 이것이 신주교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급기야 5월 13일(아마 토요일이었다), 덕원신학교와 수도원이 폐쇄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모두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부제였던 나는 같은 반의 장선홍 부제와 함께 서(西)평양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평양교구장인 홍용호 주교가 행방불명됐다. 홍주교는 평양에서 10리쯤 떨어진 서포리수녀원에서 종신서원할 수녀들을 면담하고 나오는 길에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했다.
홍주교는 납치되기 전에 신학교 폐쇄에 항의하고, 성직자들의 석방과 교회재산 반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김일성에게 보냈었다. 그러자 내무장관이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왔고, 홍주교는 수차례 거절했다가 세 번째 연락을 받고 만나겠다는 전갈을 보낸 직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북의 두분 주교님이 모두 납치된 상황. 교회에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감돌았다. 총대리신부가 차부제 두명만 남고 모두 재량껏 서울 신학교로 가라고 말했다. 이때 지학순 주교(전 원주교구장)는 이북 교회의 사정을 서울을 통해 로마에 전하는 임무를 띠고 월남길에 올랐으나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9년 6월이 되자 총대리 신부부터 납치되기 시작했다. 차부제들이 있어도 큰 도움이 안되겠다고 판단한 교회 장상들은 차부제들도 월남할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몇 달동안 고향에서의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50년 1월 어느 날이었다. 평양교구청에서 생활하던 장부제로부터 이남에서 사람이 올터인데 따라가 보지 않겠느냐는 전갈이 왔다. 이런 연락은 아마 지학순 주교에게도 닿았던 모양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나는 평양에서 만나 월남행을 논의했다. 결론은 한번 모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온 사람의 주선으로 안내원과 접촉할 시간과 장소는 1월 어느 날 저녁 7시, 평양시내의 한 여관으로 정해졌다. 저녁을 먹은 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주교를 남겨두고 여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19살의 앳된 얼굴의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일 오후 3시 기차로 금교역까지 오라고 했다. 다음날 지주교는 서평양역에서 기차를 탔다. 나는 다음 정거장인 남평양역에서 승차했다. 그 안내원은 평양역에서 타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1월 중순의 한파는 매서웠고 얼음창고 같은 열차안은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차가웠다. 우리는 안내원이 매수한 인민군 소좌의 도움으로 무사히 금교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교역을 빠져나오려는데 내가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월남에 한번 실패한 지주교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마치 농부같은 차림새를 했지만 나는 양복과 외투에다 방한모에 안경까지 썼으니 검열관이 수상히 여겼던 모양이다. 출구에서 나오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데 인민군 소좌가 주머니에서 무슨 쪽지를 꺼내 보여주자 통과시켜 주었다.
금교의 예정된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우리는 다음날 이씨라는 사람의 안내로 그의 집에 피신했다가(아주 시골이었다) 다시 금교로 나와 공산당 조직책인 조씨에게 인도됐다. 그는 말하자면 이중 간첩으로, 남한으로 5명 이내의 간첩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훤한 대낮인데도 신작로를 따라 38선쪽으로 안내하는 그의 행동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다. 가끔 길가 참호에서 누구냐하고 인민군이 튀어나오면 나야, 나라고 하면 아무런 제재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밤 9시쯤 되었을까. 38선 가까이 다다르자 안내원이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될 수 있는대로 발소리를 내지 말 것, 38선 건너편에서 국방군이 누구냐고 소리치면 움직이지 말고 바로 멈춰설 것 등이었다. 얼마쯤 안가서 조씨는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며 빠졌다. 우리 일행은 나와 지주교, 그리고 남북을 오가는 장사꾼 등 3명.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데 한가닥 쇠줄이 나온다. 이것이 38선이다는 장사꾼의 말에 우리는 조심스레, 그러나 감격에 넘쳐 38선을 넘었다. 이 한가닥 쇠줄이 뭐길래 민족을, 핏줄을 갈라놓는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하였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한참을 더 걷는데 저쪽에서 누구냐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국방군이었다. 안내원의 말대로 손을 들고 월남자요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이남 검문소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토성역에서 서울로 향했다. 월남길에 오른지 5일 뒤인 50년 1월 17일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노기남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나와 지주교의 월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만약 신학교에서 월반을 하고 48년에 사제가 되었다면, 그리고 49년 교구장이신 홍주교님께서 조금 늦게 납치되시어 그 사이 내가 사제품을 받았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제로 살게 하신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느낀다. 또 그것은 그때 순교하신 모든 분들의 삶까지 살으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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